공감, 함께하다
KEAD 툰
함께 일하는 세상을 위한 장애 유형별 에티켓 – 뇌전증장애 편
그림 권도연 글 편집부
KTX 열차 앞, 현수가 손목시계를 보며 누군가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는 현수. 팀장님, 왜 안 오시지? 전주행 지금 타야 하는데…. 그때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젊은 여성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현수 씨!
기차 안, 현수와 긴 머리를 묶은 유 대리가 나란히 앉아 있다. 유 대리가 한숨을 몰아쉬며 말한다. 하아, 늦을 뻔했죠? 팀장님께서 대신 전주 교육장에 가달라고 말씀하셔서 후다닥 왔어요. 팀장급 긴급회의에 들어가셨거든요. 그녀에게 물통을 권하며 대답하는 현수. 아, 그랬군요. 물 좀 드실래요?
전주역, 현판이 보이고 현수와 유 대리가 나란히 걸어 나온다. 핸드폰을 손에 쥔 채 현수에게 물어보는 유 대리. 택시 잡아야죠? 현수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며 대답한다. 아뇨, 전북지사 분들이 차로 픽업해주신다고 하셨어요. 전화해볼게요.
자동차 안, 운전석에 안경을 쓴 푸근한 인상의 전 과장, 보조석에 현수, 뒷자리에 유 대리가 앉아 있다. 전 과장이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에게 말한다. 저희 팀장님도 함께 오시기로 했는데요잉. 회의가 급히 잡혀가지고 저만 왔지라~ 그나저나 금시에 가을도 다 가부렸죠잉? 고개를 끄덕이며 속마음으로 말하는 현수. 사투리가 정겹네~ 유 대리가 뒷좌석에서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친다. 맞아요. 단풍 구경도 못 갔는데 너무 아쉬워요~
00 교육장 앞, 전 과장과 유 대리, 그리고 현수가 나란히 서 있다. 조금 지친 표정의 유 대리가 말한다. 으아~ 쉬지 않고 4시간 교육이라니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머리를 긁적이며 너스레를 떠는 현수. 저는요, 솔직히 졸려서 죽을 뻔했습니다. 하하. 그런 이들에게 커피를 제안하는 전 과장. 그런 의미에서 카페인 한잔씩 드시고 올라가실랍니까? 기차역 가는 길에 단풍이 끝내주는 카페가 있어라~.
색색의 단풍으로 둘러싸여 있는 카페, 차에서 내린 세 사람이 저마다 한마디씩 한다. 유 대리가 두 손을 마주 잡고 어머, 과장님! 카페가 너무나 제 스타일이에요! 단풍도 진짜 예쁘다아, 호호. 사진을 찍으며 맞장구치는 현수. 오오, 완전 인스타 각인데요? 전 과장이 즐거워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우리 와이프도 좋아하는 곳이지라~
카페 안, 카운터 앞 계산대에 세 사람이 서 있다. 카페 직원에게 커피를 주문하던 전 과장. 따수운 아메리카노 석잔……그가 휘청이며 매장 바닥에 쓰러진다. 당황한 현수가 어엇~ 괜찮으세요? 하고 다급하게 묻는다. 유 대리 또한 큰 목소리로 외친다. 전 과장님!
전 과장이 쓰러진 채 몸을 덜덜 떨기 시작한다. 매장에 있던 30대 여성의 뒤로 숨으며 말하는 초등 여자아이. 엄마, 저 아저씨 왜 저래? 무서워…. 주변에 있던 50대 남성이 걱정어린 목소리로 말한다. 쯔쯔, 젊은 사람이 간질이고만? 당황해서 무릎을 꿇은 채 방황하는 현수. 어쩌지…? 119 불러야겠지? 이때, 침착하고 의연한 표정의 유 대리가 현수에게 말한다. 현수 씨, 미안하지만 겉옷 좀 벗어서 둘둘 말아줄래요?
신속하게 현수의 옷을 전 과장의 머리에 고이는 유 대리. 주변 구경꾼들에게 침착하게 설명하며 응급처치한다. 뇌전증 증상 때문에 이러는 것이에요! 조금 있으면 멈출 테니까 주변에 위험한 물건은 치워주세요! 현수 씨는 전 과장님 안경을 벗겨주고 넥타이랑 허리띠 좀 풀어주고요. 그런 그녀를 힘껏 돕는 현수. 네… 넵!
전 과장이 안경과 허리띠가 풀린 채로 계속해서 발작 중이다. 걱정스러운 현수가 전 과장의 팔을 쥔다. 이를 보고 다급히 말리는 유 대리. 노노! 팔다리를 억지로 붙잡지 말아요! 3분 정도면 멈추는 게 일반적이니까 119는 그 이후에 부르죠. 일단 혀가 기도를 막으면 안 되니까 옆으로 눕히게 도와줘요! 그리고 동영상 촬영도 해주세요. 구조대가 오면 환자의 상태를 정확히 알려주게요.
얼마 후, 어느덧 정신을 차린 전 과장이 바닥에 앉아 있다. 현수와 유 대리가 몸을 낮춘 채 그를 부축하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멍한 표정의 전 과장이 오메, 지가 또… 발작을… 혔당가요? 그런 그를 걱정하며 묻는 유 대리. 과장님, 정신이 좀 드세요? 현수도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휴, 다행이에요.
전 과장의 자동차 안, 보조석에 전 과장, 뒷좌석에 현수와 유 대리가 앉아서 대화 중이다. 전 과장이 어렵게 입을 연다. 작년 말쯤 뇌전증 진단을 받았어라. 근디 약을 잘 챙겨 묵었고 큰 발작 없이 잘 지냈는데요, 요즘 야근이 많아 잠을 통 못 자고 술자리도 있고 혀서 방심을… 암튼 간, 두 분께 신세를 졌네요. 진심으로 감사해요잉~ 그런 그를 여전히 걱정하는 유 대리가 말한다. 과장님, 수면 부족도 만병의 근원이에요. 그리고 뇌전증 환자인데 술은 정말 안되세요! 카모마일 티 좀 드세요. 심신을 안정시켜준대요. 이때 현수의 핸드폰에서 문자 알림이 온다. 대리기사님이 곧 도착이랍니다.
전주역 앞, 현수와 유 대리가 나란히 걷고 있다. 쌍으로 엄지척하는 현수. 저요, 유 대리님을 다시 봤습니다. 완전 영웅 같던데요? 어떻게 그렇게 차분하게 대처를 척척 잘하세요? 담담하게 대답하는 유 대리. 친오빠가 같은 장애가 있어요.
KTX 기차 앞, 대화를 이어가는 두 사람. 현수가 조금 놀란 표정으로 죄송하다고 한다. 차분한 어조로 말을 잇는 유 대리. 죄송할 일은 아니죠. 다만, 사람들이 간질이라고 부르지 않았으면 해요. 간질의 어원을 따져보면 그리스어로 ‘악령에 사로 잡혔다’라는 이상한 뜻이거든요. ‘뇌전증’이 맞아요. 뇌의 신경세포에 이상이 생겨서 과도하게 전류가 흐르고, 흥분상태가 되면 일시적으로 발작하는 거니까. 간질은 사회적 편견과 오해가 정말 심한 단어거든요.
기차 안, 그런 그녀를 박수로 추켜 주는 현수. 아까 카페에서 한 아이가 대리님 보고 ‘의사 선생님인가 봐’ 했거든요? 정말 의사처럼 잘 아시네요? 유 대리가 미소를 짓는다. 사실 친오빠가 의사예요. 자기 병을 잘 알고 싶어서 의사가 됐대요. 뇌전증이 있더라도 훌륭하게 사회생활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화가 반 고흐도, 작가 도스토옙스키도, 과학자 에디슨처럼, 몰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