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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읽을 수 있는 권리

최근 재판부가 청각장애인을 위해 쉽게 쓴 판결문이 화제가 됐다. 쉬운 말을 고르고 삽화를 곁들여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이지 리드(easy read, 쉬운 정보)’ 방식으로 작성한 첫 판결문이었다. 이 판결문은 장애인뿐만 아니라 법률 용어를 어렵게 느끼는 비장애인에게도 호응을 얻었다. 또한, 장애인을 위한 쉬운 글쓰기가 왜 필요한지 다시 논의하는 계기가 됐다.

편집부

저울과 판사봉
청구를 기각한다 → 안타깝지만 졌습니다

지난 12월 2일, 서울행정법원은 청각장애인을 위해 ‘이지 리드(easy read)’ 방식으로 쓴 첫 번째 판결문을 내놨다. 이지 리드란 구어체의 짧은 문장과 그림 등으로 이해하기 쉽게 정보를 전달하는 글쓰기를 말한다. 법원이 어려운 한자어, 일상에서 잘 쓰이지 않는 용어를 최대한 사용하지 않고 실생활에 사용되는 언어로 판결문을 구성했다는 뜻이다.
판결문은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는 문장에 괄호를 하고 ‘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라는 표현을 덧붙였다. 판결 취지를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그림도 삽입했다.

담장 너머 축구 경기를 바라보는 어른, 청소년, 아이의 모습을 비교하는 두 장의 그림. 왼쪽 그림은 세 명이 똑같이 나무 상자 한 개씩 딛고 서있어, 가장 키가 작은 아이만 담장 너머를 보지 못한다. 오른쪽 그림은 청소년은 나무 상자 한 개를 밟고, 아이는 두 개의 나무 상자를 밟고 서 세 명 모두가 담장 안 축구를 응원한다.  그림 하단에 '위 그림 중 왼쪽 그림과 같은 상황이 원고가 겪은 상황이라면, 평등원칙에 위배되어 위법하다고 볼 여지가 큽니다. 재판부는 이 부분을 세심하게 살펴보았습니다.'라고 써있다.
서울행정법원이 작성한 이해하기 쉬운 판결문의 삽화와 설명 일부 / 사진. 서울행정법원

판결문이 나온 소송은 청각장애인 A씨가 서울 강동구청을 상대로 제기한 장애인일자리 사업 불합격 취소소송이었다. 원고는 중증 청각장애인들이 충분한 면접 지원을 받지 못하는 등 채용절차에서 차별을 받았다며 강동구청의 불합격 처분을 취소해달라고 주장했다. 1심 판결은 원고 패소였다. 평등원칙을 위반한 절차상 위법이 있다고 인정하기는 어렵다는 이유였다. 재판부는 “청각장애인인 원고와 다른 지원자들의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모두에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다”라고 설명했다. 원고가 왼쪽 그림처럼 높이가 같은 받침대에 올랐지만 세 사람 모두 경기를 보는 데 문제가 없는 높이라는 판단이었다.

장애인의 탄원서와 UN장애인권리협약

쉽게 쓴 판결문은 원고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원고는 판결이 나기 전인 10월 22일에 알기 쉬운 용어로 판결문을 써달라고 재판부에 탄원서를 냈고, 이에 재판부가 ‘장애인의 당연한 권리’라며 화답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 UN장애인권리협약을 언급했다. “UN장애인권리협약 제13조는 ‘장애인이 평등하게 사법에 효과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보장하도록 하는’ 규정을 두고 있다”라고 밝혔다. UN장애인권리협약은 장애인의 사법 접근성을 보장하기 위해 점자, 수어, 이지리드, 오디오 및 비디오 등 의사소통 보강 수단을 개발하라고 권고한다.
쉬운 판결문이 나온 배경에는 재판장의 경험과 평소 고민도 있었다. 이 재판을 맡은 강우찬 판사는 2022년 8월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UN장애인권리협약 제2·3차 심의에 한국 사법부 대표로 참석했다. 심의는 세계 각국이 UN장애인권리협약을 제대로 이행하는지 검토한다. UN장애인권리위원회는 9월에 심의 결과를 발표했는데 한국에서 장애인 차별금지법(「장애인 차별 금지 및 구제 등에 관한 법률」) 제26조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해당 조항은 사법·행정절차 및 서비스 제공에 있어서 장애인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이다.
현행법은 장애인 사법지원을 위해 점자 문서 및 수어 통역 등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어려운 법률 용어 등으로 인해 소송 당사자인 장애인이 판결문을 이해할 수 없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서울행정법원이 처음으로 작성한 쉬운 판결문이 장애인 사법 접근성이 더욱 개선되는 계기가 될 수 있을지 관심을 불러 모으고 있다. 지난 1월 13일에는 더불어민주당의 최혜영 의원(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이 관련 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장애인이 소송 당사자일 경우 이해하기 쉬운 판결문을 의무로 제공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발달장애인을 위한 읽기 쉬운 자료

‘이지 리드(easy read)’가 필요한 곳은 법원뿐만이 아니다. 특히, 발달장애인이나 청각장애인처럼 복잡한 글을 읽기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쉬운 글쓰기로 정보 접근성을 보장하는 방안이 절실하다. 현재 이지 리드는 장애계와 공공 부문에서 조금씩 시도되고 있다.
2018년에는 서울시 영등포구청 지원으로 서울시읽기쉬운자료개발센터 ‘알다’(http://www.easy-read.or.kr)가 설립됐다. ‘알다’는 「발달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발달장애인의 알 권리 보장을 위한 활동을 수행한다. 읽기 쉬운 자료 가이드라인을 개발하고 자료를 제작한다. 지난 연말에는 발달장애인을 위한 읽기 쉬운 자료 10종을 제작했다. 장애인복지, 주택, 청년, 돌봄지원, 공공보험 등 5개 분야 서울시 지원정책을 정리하고 돈 관리, 직장생활, 금융안전, 집안일, 약 먹기 등 5개 주제로 일상정보를 담았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은 이지 리드 제작방법과 사례를 보급하고 있다. 2021년에는 알기 쉬운 자료 개발 순서, 방법, 당사자 검증 방법, 점검표 등의 내용을 정리한 <알기 쉬운 자료 제작 안내서>와 발달장애인의 직업 탐색과 정착을 지원하는 <발달장애인을 위한 직업정보서>를 발간했다. 2022년에는 직장생활 안전, 건강, 경제를 주제로 알기 쉬운 자료를 개발해 배포했다. 또한, 책자뿐만 아니라 직무 수행과 운동법을 다룬 영상 등 다양한 미디어를 제작해 장애인의 정보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발달장애인을 위한 알기 쉬운 건강이야기> 책표지
<발달장애인을 위한 알기 쉬운 경제이야기 일> 책표지
<발달장애인을 위한 알기 쉬운 직업정보서> 책표지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이 발달장애인을 위해 개발한 알기 쉬운 자료

‘쉬운 글’이 필요한 모두를 위해

지난 연말에는 서울시 시민기획단이 쉬운 정보 쓰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지 리드를 보급하는 사회적 기업 소소한소통의 자문을 받아 서울시청 시민청 공간에 쉬운 글로 작성한 안내문을 부착했다. 시민청 지하1층 담벼락미디어와 소리갤러리에 전시된 작품에도 쉬운 설명을 함께 게시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작품이나 유물을 소개하는 글이 지나치게 어렵다고 느꼈던 시민이라면 쉬운 글쓰기의 필요성에 크게 공감할 수 있는 프로젝트였다.
서울행정법원이 처음 시도한 이지 리드 판결문도 완벽하지는 않다. 4쪽은 판결 내용을 쉽게 요약하고 있지만 8쪽은 기존 판결문 형식 그대로 쓰였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판결의 엄밀성을 지키기 위해 기존의 글쓰기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도 내놨다. 장애인뿐 아니라 모두를 위한 쉬운 글쓰기를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지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이천이십이년 십일월 시민청 시민기획단의 '쉽게 쓰는 시민청 : 쉬운 정보 쓰기 프로젝트' 포스터
운영조례 등 복잡한 글로만 표기된 기존 시민청 이용 안내 팻말과 그림과 함께 쉽게 표기된 이지 리드 팻말의 실물본

서울시청 시민청에 쉬운 글쓰기를 시도한 시민기획단의 프로젝트 / 사진. 시민청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