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AD 웹소설
『고양이 눈 키스』
1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 XX
글. 김뜰
뇌병변장애를 가진 작가로 영화, 웹소설, 웹드라마, TV 드라마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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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이(23세~29세, 뇌병변장애, 대학생~광고영상업체 신입사원)
휠체어 사용 장애인. 가만히 앉아 있으면 장애인으로 보이지 않지만 움직이면 굳은 몸동작이 드러나고 말하는 것 역시 약간 어눌하다. 그러나 웃는 얼굴로 ‘팩트폭행’을 서슴지 않는다. 일하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사회생활 경험이 적고 인간관계도 좁아 사람들에게 오해를 사는 경우가 많다.
그 XX(21세~27세, 대학생~광고영상업체 팀장)
태어나서 장애인을 본 게 고영이가 처음이다. 나쁜 의도가 있어서라기보다 잘 모르고 서툴러서 실례를 저지르는 스타일.
머리도 좋고 일머리가 있어서 이른 나이에 일찍 승진했다. 약 서너 번 해 본 연애가 전부이고 외동아들이라 여자를 잘 모른다.
팍씨, 누구 하나 걸리기만 해 봐라, 전동휠체어 시속 10키로로 확 들이받아 줄라니까.
고영이의 하얀 얼굴이 붉어졌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눈가를 간질간질 간지럽히는 검고 긴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넘겨 댔다. 한마디로 독이 잔뜩 올라 있던 날이었다.
기업 신입사원 공개채용에 정도가 심한 뇌병변장애인이란 사실을 숨기고 서류전형 지원서를 넣어 두면 항상 어김없이 통과되어 2차, 3차 최종면접까지 오르지만, 면접장 문턱을 넘어 휠체어를 타고 들어오는 고영이의 모습에 면접관들은 당황스러운 얼굴을 감추지 못하곤 했다.
그날도 면접을 보고 오는 길이었던 영이는 면접 내내 화장실은 혼자 갈 수 있는 거냐, 외부 일정은 어떻게 소화할 생각이냐, 장애인 콜택시를 매번 불러 줘야 하냐, 우리 회사는 재정이 넉넉하지 않아서 요구사항이 있어도 지원을 해 줄 수 없다 등등, 누가 해달라는 말도 안 했는데 지레짐작으로 쏟아내는 걱정을 무기 삼아 ‘우리는 당신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는 그들의 거절에 온몸을 두드려 맞아 너덜너덜 낡아 빠진 상태였다.긴장이 풀렸는지 감기몸살 기운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어 동네 내과를 찾았는데, 진료 대기실에 앉아 기다리던 할머니와 할아버지 들이 그 전동휠체어는 얼마쯤 하는지 물어 왔다. 영이가 대답하려고 입술을 채 달싹거리기도 전에 자기네들끼리 예상 가격에 대한 격렬한 배틀이 붙었다.
심신이 지친 영이는 그냥 외면했고, 어르신들도 그냥 거기서 끝이 났다면 좋았을 텐데 어느 할머니 한 분이 가격이 얼마든지 간에 장애인들은 공짜로 받아서 쓰는 거란 말을 시작으로 장애인들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면서 국민들 세금을 빨아먹고 사는 기생충이란 식의 발언들이 이어졌다.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라 삐이- 소리가 나기 일보 직전인데 누군가 자길 쳐다보는 또 다른 시선을 느낀 영이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가 진료를 받고 나오던 한 남자를 발견하고 서로 눈이 마주쳤다.
호리호리하게 우뚝 솟은 느낌의 큰 키, 제멋대로 나풀거리는 말총머리, 사각형의 잠자리 안경테, 무쌍에 가로로 긴 담백한 눈매, 없는 잘못도 털어놔야 할 것 같은 날카로운 눈빛.‘쓰읍, 저 얼굴 낯이 익은데... 어디서 봤더라..?’
아무튼 그 남자 덕분에 어르신들과 한바탕 입씨름을 벌일 뻔했던 영이는 빡침의 레벨이 한 단계 낮춰지고 때마침 간호사가 고영이님 들어가실게요, 하고 부르는 바람에 어르신들을 뒤로 하고 휠체어를 몰고 진료실로 들어가는데, 그 와중에도 그 남자는 계속 영이를 응시하고 쳐다봤다.
깐깐한 의사 선생님에게 이런저런 잔소리와 함께 진료를 받으면서도 영이는 머릿속에서 남자를 어디서 봤는지 추억 저장고 속 파일을 열심히 뒤적였고, 진료를 마치고 나오려는 순간 기억이 나서 의사 선생님께 “아! 그 XX!”라는 막말을 남기며 진료실을 나왔다.
스테이션에서 진료비와 처방전을 받고 있는 내내 영이는 내가 벌써 알츠하이머도 아니고 왜 기억이 퍼뜩 나지 않은 건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마도 카고바지에 체크무늬 셔츠만 입고 다니던 그 때의 패션과 지금의 멀끔하고 세련된 수트 차림이 매칭이 안 되어서 누군지 바로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 같다.
하긴, 나도 그땐 계절이 바뀌는 철마다 인터넷쇼핑몰을 돌아다니며 온갖 예쁜 옷들을 골라 사서 매일매일 다른 패션, 다른 콘셉트에 패셔니스타로 불렸지만 지금은 면접 보는 날이 아니면 트레이닝복 세트 차림이 교복이지. 영이가 쓴 입맛을 다셨다.그 XX는 간단하게 정의하자면 대학 때 강의 하나 같이 들은 적이 있었던 후배, 정도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놈은 꽤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같이 들었던 수강 과목은 아마 제목이 ‘리더십의 이해’였나? 암튼 그랬던 것 같다. 여성들의 인권이 성장하고 성 평등이 이뤄졌다곤 해도 그 과목의 수강생 중 여학생은 영이를 포함해 고작 3명이 전부였다.
MBTI 유형이 ENTJ였던 영이는 리더십에 강한 관심을 갖고 있던 터라 두 눈을 반짝이며 강의실에 앉아있는데 들어오는 학생들마다 영이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자인 데다가, 장애인이기까지 한 영이가 이 강의를 들으러 왔다는 게 어리둥절한듯 보였다.
영이는 그래, 볼 테면 쳐다봐라, 내가 기가 죽나. 안면몰수하고 강의나 수강하자 했는데, 이 강의, 꽤나 빡센 수업이었다. 필기시험 30%에 실기시험 70%로 합산이 되어 성적이 매겨진다고 했다. 실기시험은 무려 20분 분량의 연극으로 직장동료들과의 소통법을 보여 줘야한다는 것.
뭔가 잘못됐다는 걸 직감한 영이는 바로 손을 털고 벗어날 준비로 수강취소 버튼을 찾고 있었는데 그놈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같이 팀플 하실래요? 저희가 끼워드릴게요.”
일러스트. 나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