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AD 웹소설
『고양이 눈 키스』
10화, 걸음마 대신 터득한 것
글. 김뜰
뇌병변장애를 가진 작가로 영화, 웹소설, 웹드라마, TV 드라마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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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이 (23세~29세)
뇌병변장애, 대학생~광고영상업체 신입사원휠체어 사용 장애인. 가만히 앉아 있으면 장애인으로 보이지 않지만 움직이면 굳은 몸동작이 드러나고 말하는 것 역시 약간 어눌하다. 그러나 웃는 얼굴로 ‘팩트폭행’을 서슴지 않는다. 일하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사회생활 경험이 적고 인간관계도 좁아 사람들에게 오해를 사는 경우가 많다.
노훈·그 XX (21세~27세)
대학생~광고영상업체 팀장태어나서 장애인을 본 게 고영이가 처음이다. 나쁜 의도가 있어서라기보다 잘 모르고 서툴러서 실례를 저지르는 스타일.
머리도 좋고 일머리가 있어서 이른 나이에 일찍 승진했다. 약 서너 번 해 본 연애가 전부이고 외동아들이라 여자를 잘 모른다.
구동혁 (27세)
광고영상업체 편집 PD노훈과 고교 동창, 군대 동기 사이다. 눈치가 매우 빠른 편이고, 분위기 파악에 능하다.
서로 비난과 험담이 주 대화지만, 노훈의 대나무숲이 되어 주는 존재다.
변태호 (27세)
카페사장고영이와 초등학교 때부터 같은 반이었고 고영이 휠체어 전담 드라이버였다. 영이를 좋아하는 맘도 있는데 친구 사이가 어색해질까 봐 감추고 있는 상태.
영이와 티키타카가 좋다.
송해린 (25세)
광고영상업체 디자이너입사 2년차. 사수였던 노훈을 좋아하는 중이고, 노훈도 이를 알고 있다.
착한여자 콤플렉스가 있는 편이다.
우지선 (29세)
간호사고영이와 초등학교 때부터 단짝이었고, 고영이의 화장실, 식사, 목욕 등등 브래지어 끈까지 올려 줄 정도로 도와줘 보지 않은 게 없다.
영이가 누구보다 믿고 의지하는 친구. 영이를 좋아하는 태호를 좋아한다.
간단히 카드지갑만 챙겨든 간소한 차림새의 직원들과 작게 웃음을 나누며 앞장서 걸어오던 30대 후반 남자. 줄무늬 PK 티셔츠에 검은 정장 바지를 입은 달달커피 담당 팀장이, 자신의 앞을 갑자기 막아선 영이 전동휠체어에 흠칫 놀라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쏜살같이 달려가는 영이를 급히 뒤따라온 훈과 동혁, 해린도 영이 뒤편에 몇 걸음 떨어져 호위무사처럼 지키고 섰다.
지난번 미팅 때 이미 안면을 터서 훈의 팀원들을 알아본 달달커피 팀장은 이내 갑작스레 등장한 그들의 목적을 알아차렸고, 온몸으로 곤란함을 표현하려는 듯 깊은 한숨, 두 손바닥을 하늘 향해 어깨 으쓱, 마른 입맛을 쩝, 쓰리콤보로 방어막을 펼쳤다.
잠시 이야기할 시간을 달라고, 10분이면 된다 했지만 달달커피 팀장 뒤에 서있던 직원들이 나서서 약속되지 않은 미팅은 어렵다며 경계태세로 쏘아봤다. 영이는 이에 굴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웃는 얼굴을 장착하더니 달달커피가 왜 이 광고 기획안을 채택해야 하는지, 자신의 기획이지만 노훈 팀장님이 이끄는 팀원들이 함께 이끌어 갈 광고기획이란 걸 적극 어필하며 조곤조곤 설득을 이어갔다. 너무나 간절해 보이는 영이의 구부정한 등허리에, 동혁과 해린이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려 하자 훈이 두 사람을 막았다.
훈은 그리 짧지 않은 회사 비즈니스 경험을 토대로 이 광고 계약이 성사될 리 없다는 걸 확신했지만, 영이가 적어도 할 만큼 했다, 스스로 느껴지도록 미련 없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영이의 설득이 계속되는데 달달커피 팀장이 영이 말을 자르며 지친 얼굴로 관자놀이를 주물러댔다. 그러고는 몸 불편한 사람 괴롭히는 악당 만들지 말고 그만해달라고, 충분히 알아들었으니 돌아가달라 했다. 이에 아직 포기 못한 영이가 몇 마디 더 입을 떼려는데, 달달 팀장이 더 이상 말도 못 붙이게 싹둑 잘라내려는 심산을 가득 담아 작정하고 말했다. 장애가 있는 분이라 어딜 가든 먼저 떠받들어주고, 배려해 주고, 원하는 바 다 들어주니까 그게 몸에 배어서 이런 거절 하나에도 견디지 못해 발끈 하나 본데, 이건 비즈니스지 사회봉사가 아니라고.
그쪽 팀원들 난처하게 만들지 말고 돌아가시라고. 장애가 흠은 아니지만 무기도 아니고, 벼슬은 더더욱 아니라고.
끝끝내 애써 웃음 지어 보이던 영이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뒤에서 다 듣고 있던 훈이 주먹을 불끈 쥐었고 화가 치밀어 한 발짝 움찔하는데 이번엔 동혁이 훈의 허리춤을 붙잡으며 참으라고, 일단 지켜보자고 달래는 눈짓을 보냈다.
1초가 1시간 같은 정적이 흘렀고, 영이가 다시 성실하게 미소 짓고는 차분히 말문을 뗐다.
“제가 꽤 많이 어릴 때부터 터득한 게 있어요. 걸음마 대신 참아내는 거. 예컨대, 코앞에 화장실을 버젓이 두고도 변기 앉혀줄 사람이 없으면 스스로의 존엄성 사수를 위해 필사적으로 참아야 하는 거고? 서너 살 꼬마 아기들이 넋이 빠져 자기들 침 줄줄 흘리는 줄도 모를 만큼 이상하게 쳐다보는 시선도, 좀 그렇긴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가뿐히 참아야 하는 거고. 사람들이 그저 습관처럼 내쉬는 한숨 소리 하나에도 ‘어쩌지? 나 때문인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주눅 들고 세상 지질한 쭈구리가 되지만? 뭐, 이것도 역시, 참아야 하는 거고.”
영이의 말에 달달커피 직원들과 팀장이 불편한 기색 역력해서는, 신발 끝으로 괜히 땅바닥 흙을 헤집고, 볼 것도 없는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하늘에 구름을 세어보는 딴청을 피웠다. 영이는 불편해하는 그들에게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근데요. 쓰읍, 초등학교 때였지 아마? 충치 치료 때문에 치과를 간 적이 있어요. 의사쌤이 아프시면 손을 들어주세요, 하는데 제가 이게 아픈 건지 안 아픈 건지 제가 판단이 안 서는 거죠. 손을 들까 말까 들썩들썩하니까, 의사쌤이 그러더라구요. ‘조금 아픈 것도 아픈 거예요~’ 그때 머리가 띵했어요. 아... 조금 아픈 것도 아픈 거였구나. 그럼 그동안 내가 이런 일 저런 일 참아낼 때마다 심장이 저릿하고 욱신거렸던 게, 나는 모르고 있었지만 내 영혼은 많이 아팠던 뜻이었구나.”
영이 말을 듣던 훈의 콧날이 시큰거렸다. 해린은 이미 눈물이 후드득 떨어지는 바람에 얼굴을 감추려 얼른 뒤돌아섰고, 동혁은 허리에 두 손을 얹은 채 쓴 한숨을 몰아쉬었다.
청중들 반응과는 달리 영이의 악보가 단조에서 장조로 조바꿈한 듯 가벼운 어투로 바뀌어 달달커피 팀장에게 다시 물었다.“달달 팀장님 혹시 MBTI가 T세요? 저도 사실 T라서, 하하.
목적성 없는 말 하는 거 되게 싫어하는데요.
이런 말 주절주절, 그래서 대체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싶은데, 그냥... 그냥 털어놓고 싶었어요. 아!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이제 생각났어요!”달달커피 팀장과 직원들, 그리고 훈과 동혁, 해린의 시선이 영이의 다음 말에 집중됐다.
“저, 평생 장애를 무기나 벼슬이라 생각한 적 없습니다.
배려해달라는 게 아니에요. 제가 참을성 하나만큼은 도가 텄는데 딱 하나 못 참고 급발진 하는 게 있어요. 제 장애가 내 사람들한테 민폐 끼치는 거. 그건 진짜 아무리 저라도 못 참겠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간절하게 부탁드려요. 이 광고 기획안 계약과 저의 장애를 결부시키지 말아주세요.”영이가 달달커피 팀장과 직원들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이며 준비해온 기획서 파일을 내밀었고, 달달 팀장은 헛기침을 몇 번 하며 말을 고르더니 파일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내부 회의를 한 번 더 진행한 뒤에 연락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영이가 훈을 돌아보자 충분히 잘했다고, 그만해도 된다는 듯 고갤 끄덕이며 두 눈을 지그시 길게 감았다 떴다. 동혁도 영이를 향해 엄지척을 들어 보였고, 해린은 물기 어린 눈으로 미소를 보냈다.서울로 돌아오는 길, 어느새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운전하는 훈도, 조수석에 탄 영이도, 뒷자리에 동혁과 해린도, 저마다 차창 밖 풍경에 시선을 두고 누구도 말하는 사람 없이 고요한 차 안이었지만, 각자의 깊은 생각에 빠져 라디오 교통방송 하나 필요로 하는 이가 없었다.
강원도 공기 좋은 밤하늘에 뜬 손톱달과 촘촘하게 수놓인 별들만이 왁자지껄하게, 생각 많은 그들을 밝혀주고 있었다.그로부터 3일 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각자의 자리에서 업무를 보던 영이와 팀원들이, 훈의 책상에서 울리는 사무실 전화벨 소리에 화들짝 놀라 일제히 돌아봤다.
일러스트. 나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