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반짝이는 워터멜론
장애는 예방되어야 하는가?
드라마 ‘반짝이는 워터멜론’은 개인적으로 방영 전부터 아주 많은 기대를 했던 작품이었다. 농인 가족의 이야기, 그리고 그 가족들 사이에서 홀로 청인으로 성장하는 코다(CODA) 소년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낼지 자못 궁금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작단계부터 장애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전문 자문위원에게 특별히 자문도 구했다고 하니 더욱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글. 차미경 문화칼럼니스트
청각장애인 부모를 둔 음악천재 은결의 고군분투기
코다(CODA)는 청각장애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청인 자녀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음악에서는 악보에서 곡을 끝내는 의미로 붙는 용어이기도 하다. 이것은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해 힘들어하는 어린 은결을 처음 만났을 때 비바 할아버지가 처음 가르쳐 준 말이다.
“코다를 악곡의 끝에 놓으면 이제부터 슬슬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서 준비를 하란 뜻이지. 비밀 하나 알려줄까? 너도 코다란다. 너처럼 가족 중에서 혼자서만 듣고 말할 수 있는 아이들을 코다라고 불러. 소리의 세계와 침묵의 세계를 이어주는 사람들이지. 말과 손으로 그리고 때로는 너처럼 음악으로.”
첫 화의 이 대사처럼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은결을 통해 코다의 의미를 새롭고 멋지게 해석해내는 작품일 것이라 기대해 마지않았다. 제목에 ‘워터멜론’은 장애를 가진 불굴의 화가 ‘프리다 칼로’의 작품 ‘Viva La Vida(인생이여 만세)’에 등장하는 그 수박이니 말해 뭐해! 그러나 우연히 1995년으로 타림슬립해 간 은결이 동갑인 아버지 하이찬을 만나게 되면서 이야기는 점점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엄마가 아빠의 첫사랑인 줄 알았는데 아버지(하이찬)는 엄마(윤청아)가 아닌 다른 여학생(최세경)을 짝사랑하고 있었다니. 처음엔 은결이 청아와 이찬을 연결해 주려고 애쓰는가 싶더니, 아버지의 청력을 잃게 만드는 ‘그 사고’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은결의 ‘아버지 사고 막기 대작전’이 되고 만다.
그도 그렇지만 청각장애를 가진 여주인공은 왜 그렇게 소극적이고 수동적일까. 1995년에 만난 엄마 윤청아는 새엄마의 학대로 늘 우울하고 들리지 않는 혼자만의 세계에서 외롭다. 마치 ‘숲속의 잠자는 공주’처럼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누군가 와서 깨워 주어야 하는 존재처럼 그려진다. 청아에게 처음 수어를 가르쳐 세상과 소통하게 하는 것도 미래에서 온 아들 은결이고 침묵의 세계에 침잠해 있는 청아를 ‘사랑으로’ 깨어나게 하는 것은 하이찬의 노력 덕분이다.
드라마 제목의 모티브인 화가 ‘프리다 칼로’ 작품 Viva La Vida(인생이여 만세) 속 워터멜론 그림
‘장애 예방’이 아닌 ‘사고 예방’ 필요
은결이 아버지의 사고를 막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내내 드는 생각은 ‘장애는 이리도 기어이 끝끝내 막아내야 하는 일생일대의 불행이며 불운인가?’ 하는 것이었다. 흔히 말하는 ‘장애예방’이 저렇게 아름다운 청춘 멜로로 새롭게 구현되는구나 하는 생각. 과연 장애는 예방되어야 하는 것인가?
‘장애예방교육’이라고 이름하는 교육의 이름을 바꾸자는 제안은 이미 오래되었다. 한 ‘장애예방교육’에서 장애예방을 위해 ‘오토바이를 타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내용을 보고 기가 막혔던 적이 있다. ‘장애 예방’이 아니라 ‘사고 예방’이어야 하고 안전을 위해 ‘오토바이를 타지 말자’가 아니라 오토바이를 안전하게 탈 수 있는 개인적, 사회적 안전 수칙을 얘기해야 더 합리적인 대안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하이찬은 은결 덕분에 ‘그 사고’를 겪지 않고 청각장애인이 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은결 덕분에 모든 사고를 막았지만 차마 예상할 수 없던 찰나에 은결을 구하기 위해 차로 뛰어든 이찬은 끝내 청력을 잃고 만다. 은결이 1995년으로 가야 했던 이유가 대체 뭐였을까? 고작 자기 때문에 아버지가 청력을 잃게 되었다는 엄청난 죄책감을 남기려고 했을까? 물론 혼자만 청인으로서 들리지 않는 모든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으로 늘 외롭고 힘들었던 은결에게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나는 것이고 혼자서 그 책임을 다 감당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그러니 마음의 짐 벗어버리고 자유롭게 네 인생을 살라는 뜻으로 인생이 준 선물이라 치자. 그래서 결말은?
장애 예방보다 차별 등 사회적 장벽 해소가 먼저
미래로 돌아간 은결은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엄마 아빠를 다시 만난다. 여전히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는 엄마 아빠. 그러나 전과는 모든 게 달라졌다. 아빠 이찬은 장인 회사인 진성악기에서 새로운 악기를 출시하고 각광받는 능력 있는 본부장이고 엄마 역시 다양한 직함을 가진 여성 리더가 되어 있다. 모두 행복해 보이는 모습.
미래에서 다시 만난 은유와 은결의 재회 장면으로 드라마는 해피엔딩이다. 그러나 만약 은결이 미래로 돌아갔을 때 여전히 엄마 아빠가 예전처럼 살고 있었다면 불행한 것이고 새드엔딩일까? 장애는 불행한 것이지만 갤러뎃 대학교(세계적인 미국의 농인대학교) 출신이라는 것과 대기업의 상속자가 되어 있다는 것으로 행복한 것인가. 결국 행복의 조건은 부와 스펙인가 싶어 어쩐지 씁쓸한 여운을 지울 수 없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제발 이 사람의 꿈을 깨지 말아 주세요.
부디 이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부디 이 사람의 청춘이 계속 반짝일 수 있도록
누군가 듣고 있다면 제발 제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세요.”
미래에 일어날 사고를 모른 채 해맑게 웃고 있는 이찬을 보며 은결이 이렇게 속으로 비는 장면이 나온다. 장애가 있다고 해서 꿈을 꾸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불행한 것은 더더욱 아니고 반짝이지 않는 것도 아닐 터이다. 장애가 불행하고 꿈꿀 수 없고 빛나지 않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어쩌면 철저히 비장애인 입장의 편견 가득한 예단 아닐까. 장애는 그 자체로 불행이거나 불운이 아니다. 장애를 예방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에게 불편하고 안전하지 않은 사회적 장벽과 차별을 예방해야 하는 것이다. 장애인은 예방되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억압과 불편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