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는 일방이 아닌 쌍방이어야 한다
호의가 권리가 되지 않기 위한 노력들
글 류승연(도서 ‘배려의 말들’ 저자)
자폐성 장애가 있는 아들은 일상의 크고 작은 일에서 비장애인의 배려를 받는다. 아들이 어렸을 때는 배려의 순간이 매 순간 절실했고 어쩌다 마주하는 사람들의 친절이 마냥 고마웠다. 이제 아들은 아빠보다 키가 훌쩍 커버린 중학교 2학년 청소년이 되었다. 성인기가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뜻이다. 그러자 이전과는 다른 것들이 눈에 보인다. 더 이상 배려를 받기만 하는 장애인으로 자라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이 생긴 것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임이 파탄 난 이유
몇 년 전 일이다. 발달장애인의 멘토 역할을 하는 비장애인 그룹을 만나러 지방 도시에 갔다. 성인이 되어 가정을 이루고 자녀까지 출산한 발달장애인 여성들을 후원하는 비장애인 여성 모임에 초대받았다. 해당 지역 사회복지 단체에서 당사자들에게 “가장 필요로 하는 도움이 무엇이냐”에 대한 사전 조사를 했다고 한다. 살림이나 육아 노하우, 경제적 지원 등의 답변이 나올 줄 알았는데 “친구가 필요하다”는 답변이 1순위로 나왔다고.
그리하여 만들어진 비장애인 멘토 그룹. 장애 여성과 비장애인 여성이 짝을 이뤄 멘토-멘티 관계를 형성했다. 친구처럼, 언니처럼, 엄마처럼 처음 시작은 좋았다. 그런데 이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유는 ‘배려’가 없어서였다. 장애 여성들이 비장애인 여성들을 배려하지 못해 관계가 파탄에 이르렀단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이유는 자명했다. 당사자들이 평생을 ‘사람’이 아닌 ‘장애인’으로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주변에서 그들을 ‘사람’이 아닌 ‘장애인’으로 대해왔기 때문이었다. ‘사람 대 사람’으로 동등한 관계를 맺어 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장애가 있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만나면 돈은 언니가 내.” , “나는 지금 심심해. 내가 심심하면 새벽 3시라도 그냥 막 전화할래.”
배려받되 배려도 할 줄 아는 사람
‘나는 장애인이잖아’가 강력한 무기이자 유일한 정체성이 된 채 성인으로 자란, 자신을 향한 비장애인의 배려가 당연한 것이 되어버린 이들은, ‘사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과 긍정적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지 알지조차 못했다.
이런 현실을 알게 되면서 큰 깨달음이 왔다. 이전까진 주변 사람들이 무조건 아들을 배려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아들은 자폐성 장애가 있으니까 비장애인인 당신들이 아들을 이해하고 포용해야 한다고. 그런데 아니었다. 그렇게 모두의 배려를 받기만 하며 자란 아들은 ‘장애인 특권’을 휘두르는 안하무인으로 자라게 될 터였다. 그래서는 안 된다. 나는 아들을 ‘사람’으로 자라게 해야 한다. 배려받되 배려도 할 줄 아는, 나와 다를 바 없는 ‘그냥 사람’. 그래야만 먼 훗날 내가 옆에 없는 세상에서도 아들이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갈 수 있다.
얼마 전 지하철을 탔다. 빈자리가 없어 서서 가고 있는데 아들이 앉고 싶었던지 바로 앞에 앉은 청년에게 손을 내밀며 “응응~ 응응~”이라고 했다. 누가 봐도 발달장애인으로 보이는 청소년이 앉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하자 선해 보이는 청년이 “여기에 앉으세요”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포즈를 취했다. 나는 그 청년이 마저 일어나기 전에 얼른 만류했다. “아유~ 고마워요~ 그런데 괜찮아요. 이 녀석도 서서 가는 걸 배워야 해요.” 아들은 투정 부리듯 조금 징징댔지만 이내 손잡이를 이리 잡고 저리 잡으며 목적지까지 잘 갔다.
그래. 이렇게 배워야 한다. 배려받는 게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수많은 반복 경험을 통해 몸으로 체득해야 한다. 하나씩 배우다 보면 언젠간 노인과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할 수 있는,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성인으로도 자랄 수 있겠지. 배려받는 장애인이 아니라 배려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게 될 아들의 미래를 응원하며…. 오늘도 특훈, 내일도 특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