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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 보고서

온고지신의 끝판왕, ‘할매니얼’

돌고 돌아 정겹고 푸근한 할머니의 품으로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하고 많은 아이스크림 중 팥 아이스크림을, 하고 많은 과자 중 약과를, 하고 많은 달달한 떡을 놔두고 흑임자 떡을 사 온 할머니를 원망하며 눈물을 터뜨린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명절에 찾아온 손주에게 할머니가 내줄법한 간식들의 위상이 바뀌었다.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서 이제는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MZ세대들은 할머니 스타일의 옛날 간식에 열광 중이다.

편집부

파리바게뜨 스타일로 재해석한 약과타르트 가 접시에 담겨있는 사진
파리바게뜨 스타일로 재해석한 약과타르트 / 사진. 파리바게뜨
‘할매니얼’ 그 폭풍의 눈, 약과의 변신

가벼운 간식거리를 사기 위해 들어간 편의점에서 감자칩 대신 약과를 고른다. 집들이 방문 선물을 사기 위해 들어간 백화점에서 케이크 대신 고급 약과를 고른다. 편의점에서 백화점까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눈에 가장 잘 띄는 매대에서 약과를 보았다면, 그건 당신의 착각이 아니다.
편의점 CU가 압구정 로데오거리의 인기 카페인 ‘이웃집 통통이’와 콜라보해 출시한 ‘이웃집 통통이 약과 쿠키’는 초도 물량 10만 개를 일주일 안에 완판할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CJ올리브영이 발 빠르게 출시한 ‘벌꿀약과’는 3개월 만에 누적 판매량 30만 개를 돌파했다. SPC 삼립은 프리미엄 전통 디저트 브랜드 ‘대한과자점’을 론칭했다. 신세계푸드와 현대백화점 역시 약과 관련 제품을 론칭하거나, 팝업스토어를 진행했다. 이러한 약과의 유행은 단순히 약과의 맛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 뒤에는 레트로 열풍을 타고 MZ세대의 새로운 키워드로 등극한 ‘할매니얼’이라는 유행이 있기 때문이다.
첫눈에 보기에도 심상찮은 할매니얼은 할머니를 뜻하는 ‘할매’와 20~30대 젊은이를 통칭하는 ‘밀레니얼’의 합성어다. 즉, 할머니 취향을 선호하는 일군의 젊은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약과를 중심으로 대두된 할매니얼의 열기가 심상찮음을 재빠르게 읽고, 식품 유통업계는 발 빠르게 ‘할머니 취향’의 식재료를 활용했다. 흑임자, 단호박, 인절미, 보리, 쑥 등 듣기만 해도 정겹고 포근한 할머니 품이 떠오르는 그런 식재료가 젊은 층의 혓바닥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인절미는 빙수, 커피, 토스트 등과 결합해 특유의 고소하고 쫄깃쫄깃한 맛을 널리 퍼뜨리고 있고, 부담스럽지 않은 달달함을 지닌 단호박은 설기, 떡, 라테, 컵케이크 등 디저트의 형태로 젊은이들의 인스타그램 피드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최신 음식 유행이 곧장 반영되는 카페 음식 시장에서 할매니얼이 젊은 세대에게 먹히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쫀득한 식감이 느껴지는 곶감 떡이 네개 있는 사진
쫀득한 식감이 느껴지는 곶감 떡 / 사진. 롯데백화점
올리브영의 벌꿀약과가 하얀 접시에 놓여있는 사진
약과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올리브영의 벌꿀약과 / 사진. CJ올리브영
각박한 사회를 향한 카운터 펀치

지금은 단순히 식품계를 넘어 라이프 스타일까지 그 범위를 확장하고 있는 할매니얼은 사실 이전부터 거세게 불어온 뉴트로 열풍과 궤를 같이한다. 새로움(New)과 복고(Retro)를 합친 신조어 ‘뉴트로(Newtro)’는 그 당시를 경험한 적 없는 젊은 세대가 복고를 새롭게 즐기는 경향을 말한다. 젊은 세대는 과거를 겪은 적이 없기에 그리움에서 기인하는 기성세대의 향수와 달리 그 자체를 새로운 문화로 즐긴다. 이는 단순히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니다. 서구에서도 할머니 스타일을 추종하는 ‘밀레니얼 세대’라는 뜻으로 할매니얼과 거의 유사한 ‘그래니 시크(Granny Chic: 세련된 할머니)’, ‘그랜드밀레니얼(Grandmillennial)’ 등의 신조어가 등장했다. 물론 서구권의 할매니얼은 우리나라의 그것과 비교했을 때 좀 더 패션과 인테리어 등의 영역에 집중되어 사용되기는 하지만, 두 가지 모두 뉴트로라는 같은 동력을 공유하고 있다.
할매니얼이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아무래도 젊은 세대가 느끼기에 갈수록 각박해지는 세상 탓이 크다. 과학기술은 계속해서 발전하고, 사회는 멈추지 않고 변한다. 동시에 사회면을 채우는 다양한 사건들은 젊은 세대가 마주할 변화무쌍한 미래의 전망이 불안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련된 것, 자극적인 것과는 조금 거리가 있을지 몰라도 포근한 할머니의 품을 떠올리게 하는 할매니얼 콘텐츠가 이러한 젊은 세대의 불안을 품어주는 것이다. 조용하지만 뜨거운 군불처럼 타오르는 작금의 인기를 보았을 때, 사회가 몰아세우는 속도와 효율의 반대편에 서서 여유와 정을 어필하는 할매니얼의 인기는 금방 식을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