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발견
우리의 쓸모를
지켜주는 차별금지법
글. 이동희 작가
세 살 때 고열로 청신경이 녹아내려, 보청기를 껴야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청각장애인이다.
에세이집 <안 들리지만, 그래도>, <나란히 걷는다는 것>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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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일까, 체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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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0년 전의 이야기다. 어렸을 때부터 순수미술을 전공했던 나는 전업작가로 살아가는 것이 두려웠다. 안정적인 소득을 보장받기 어려웠거니와 대중들에게 인정받아야 하는 고단한 여정이 부담스러웠다.
돈을 벌고자 여러 가지 일을 시도했다.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수년 이상 근무했지만 본사 정직원 전환에는 실패했다. 같은 시기에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동료들 중 몇 명은 최근에 매장 최고관리직까지 올랐다. 인턴으로 근무했던 출판사에서도 1년 동안 온갖 잡무를 도맡았지만 계약 연장에 실패했다. “이제 너 없으면 힘들어서 일이 안 돌아간다”라고 치켜세워주며 늘 바나나 우유를 사주셨던 차장님은 마지막 날, 내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돌고 돌아 다시 작가의 길로 돌아왔다. 책도 출간했다. 비슷한 고민을 가진 사람들에게 강연을 하며 응원을 북돋아 준다. 다행히 창작이나 강의로 벌어먹고 살 수 있게 됐다. 운이 좋았다. 그래도 종종 회의를 느낀다. 나는 과연 지금 하는 일을 ‘선택’한 것일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이라고 ‘체념’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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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의 쓸모도 보장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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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농인 청년들도 비슷한 고민을 하는 모양이다. 대개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 번째 유형은 장애인 일자리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비정규직 혹은 단순 계약직에 종사하거나, 장애인 직업능력개발원 등에서 기술을 배우는 사람들이다. IT 및 전기 직종, 네일아트, 커피 바리스타나 제과제빵과 같은 여러 기술을 배운다.
두 번째 유형은 예술 창작가의 길을 걷거나 제조 및 서비스 기반의 창업에 도전한다. 순수미술 혹은 디자인 계열을 전공한 농인들의 비율이 높은 것은 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더구나 이중 대부분이 자신의 전공과 무관한 일을 배우며 생계를 잇고 있다는 사실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장애인들은 대부분 자신의 ‘쓸모’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괴로워한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하지 못하고, 노력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 무엇보다 이 세상에 내가 쓸모를 다할 수 있는 자리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자신감을 떨어트리고 존엄성을 쉽게 파괴한다.
‘자신의 쓸모’란 비단 장애인에게만 해당하는 문제는 아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각자가 필연적으로 가지게 되는 여러 소수적 특성 때문에 삶의 어느 지점에서 반드시 차별을 받을 수밖에 없다.
남자일 수도 있고, 여자일 수도 있다. 한국에서 태어났을 수도 있고, 미국에서 태어났을 수도 있다. 수도권에서 자랐을 수도 있고, 지방에서 자랐을 수도 있다. 좀 더 피부가 까말 수도 있고, 흴 수도 있다. 젊을 수도 있고, 늙을 수도 있다. 군복무를 했을 수도 있고, 임신과 출산을 경험했을 수도 있다. 정규직일 수도, 계약직일 수도, 아르바이트생일 수도 있다. 혼자 살거나, 함께 살 수도 있다. 결혼을 했거나 동거를 할 수도 있다. 종교를 믿을 수도 있고, 저마다의 정치적 의견을 가질 수도 있다. 선천적으로 혹은 아프거나 다쳐서 장애가 있을 수도 있다.
장애인이라고 해서 더 유별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더 불리한 것도 아니다. 장애란 정체성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러니 임신, 출산, 육아로 인해 여성의 경력이 단절되지 않아야 하듯이, 혈연과 지연으로 인해 누군가 부조리한 상황을 겪어서는 안 되듯이, 장애인에게도 자신의 쓸모를 다할 수 있는 기회를 최대한 보장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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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존엄성과 공정성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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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차별금지법은 필요하다. 기업에서는 직원 수의 몇 퍼센트의 장애인을 의무 고용해야 하고, 여러 환경에서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편의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 직무와 관련 없는 장애에 관한 질문을 하는 면접은 차별 행위로 판결되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지원하기 위해 장애인 연금을 더 확충했다. 취업 가산점도 생겼고, 심지어 장애 예술인들을 위한 창작지원금도 운영되고 있다. 분명 예전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다.
그러나 더욱 정교하고 섬세해져야 한다. 이미 16년이나 된 법이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고 험난하다. 여전히 법의 사각지대에서 자신의 쓸모를 느끼지 못하는 장애인들이 많다. 비율에 따른 장애인 고용이 의무화되었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기업에서는 단순 구색을 맞추기 위해 계약직으로 고용하는 경우가 많다. ‘가산점’을 받고 들어온 인재가 왜 ‘깍두기’ 취급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강제적인 시간제 근무와 적은 봉급, 열악한 근로 환경 등이 여전히 해결해야할 숙제로 남아있다.
개인적으로는 학교부터 변화를 꾀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특수학급을 포용해서 여러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자라며 서로를 이해하는 법을 배우고, 장애아동이 자신의 진로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도록 제약 없는 교육과 편의 제공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 ‘수어로 시 쓰기’, ‘점자 만들어보기’ 같은 체험과, ‘고요 속의 외침’, ‘어둠 속에서 길 찾기’ 같은 게임 활동도 적극 늘려 서로 간의 장벽을 어렸을 때부터 허물어야한다. 공정하고 평등한 고용은 교육부터 시작해야 한다. 단순히 지원을 늘리고 구색 맞추기에만 급급할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사회의 변화를 꾀할 시기다.
우리는 모두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쓸모를 직접 정의하고 결정하고 싶다. 평범한 일상에서 찾을 수 있는 행복을 발견하며 누리고 싶다. 차별금지법은 장애인이나 소수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존엄과 공정성을 위한 법이다. 장애와 관련 없이 우리는 모두 같은 욕구와 꿈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의 방향을 정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