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일하는 세상

각자의 몫을 다해 하모니를 이루는 아름다움

시각장애인뮤직컴퍼니 한빛예술단

글. 김엘진  
사진. 황지현  
영상. 신현균

  • 세계 최초의 시각장애인 오케스트라 한빛예술단이 연습을 하는 한빛맹학교 공연장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교향곡이 온몸을 감쌌다. 오늘 연주곡은 드보르작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였다. 지휘자이자 음악 감독은 존재하지만 지휘를 볼 수 없는 39명의 단원들은 다른 이의 파트까지 외운 채 서로의 음악에 귀를 기울이며 연주를 이어간다. 단원끼리 눈빛을 맞출 수도, 동작을 볼 수도 없지만 이들은 서로의 숨소리에도 집중할 수 있었고, 그들의 음악은 완벽히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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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 최초 시각장애인 오케스트라

  • 2003년 시각장애인 직업 선택의 새로운 활로를 찾고자 창단된 시각장애인뮤직컴퍼니 한빛예술단(이하 예술단)은 세계 최초의 시각장애인 오케스트라를 운영하고 있다. 오케스트라 외 브라스 앙상블, 체임버오케스트라, 타악앙상블, 프로젝트 더 밴드 팀으로 구성된 예술단은 초청 공연 등을 통한 자체 수익과 보조금 수입으로 39명의 단원들과 10여 명의 비장애인 직원에게 급여를 지급한다.
    정해궁 한빛예술단 원장은 “예술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지금도 어려운 일이지만, 장애인에 대해 편견이 훨씬 만연했던 20여 년 전에는 더욱 불가능해 보이는 과제였어요. 그래도 김양수 한빛재단 이사장님이 시각장애인이셨기에 편견 없는 열정과 의지로 꾸려나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라고 전했다.
    특히 현재는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이하 공단)에서 추진하고 있는 ‘직장 내 장애인 인식개선 문화체험형 교육 사업(이하 사업)’이 예술단 운영에 큰 도움이 된다고. 이 사업은 각 기업에 방문해 장애인 인식 개선에 대한 내용을 자연스럽게 녹인 공연을 제작·진행하는 것으로, 예술단은 이 사업을 통해 1년에 총 55회의 공연을 하고 있다.
    그 외에도 예술단은 2009년 이후 연간 100회 이상의 공연을 진행하며 매년 수만 명의 관객들을 만나고 있는데, 이를 위해서도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고 있다. 단원들이 모두 시각장애인이기에 외부 이동을 할 때에는 근로지원인과 사회복무요원들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
    “우리 예술단은 많은 이들의 열정과 배려를 통해 운영되고 있습니다. 관련 도움을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려요.”
    정 원장의 말에 이영주 제2바이올린 연주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는 예전에 적성이나 흥미와는 관계가 없는 일을 오랫동안 해왔어요. 일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없었죠. 그런데 한빛예술단을 만난 후 일하며 느끼는 행복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회에서 시각장애인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이 정말로 적은데, 이런 기회를 만들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해요.”

    김종훈 음악감독, 김은빈 트럼펫 연주자, 박진혁 트롬본 연주자, 이영주 제2바이올린 연주자(왼쪽부터)

    김종훈 음악감독, 김은빈 트럼펫 연주자, 박진혁 트롬본 연주자, 이영주 제2바이올린 연주자(왼쪽부터)

  • ‘장애’ 아닌 ‘실력’으로

  • 그러나 한빛예술단이 알려진 것은 단지 장애인 연주단체이기 때문이 아니다. 예술단의 실력은 이미 많은 곳에서 인정받고 있다. 예술단은 그간 러시아 소치동계올림픽 폐막식, 한-아세안 정상회담 축하 공연 등 국가적 행사에 꾸준히 초청됐으며, 국내 최대 아트마켓인 ‘제주해비치아트페스티벌’에서는 2016년 쇼케이스 1위를 달성하는 등 음악적 전문성과 대중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특히 2017년부터 2019년까지 3년간 민간예술단체 우수공연 프로그램으로 선정되며 공연 상품으로서 가치도 입증했다.
    정 원장은 “처음 예술단으로 오며 장애인 예술계에서 1등을 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었는데, 와보니 이미 우리가 탑이더라고요. 이제는 비장애인 예술계에서도 당당히 실력을 겨룰 수 있는 단체가 되기 위해 달리고 있습니다”라며 실력에 대한 자부심을 보였다.
    김은빈 트럼펫 연주자도 이에 동의한다. 트럼펫을 전공해 음악가로 살다가 실명하게 됐다는 그는 실력에 대한 기대는 하지 않고 이곳에 왔다고 말한다.
    “실명 후 악기를 다시는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가 예술단에 대해 알게 되고, 음악을 다시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으로 오디션을 봤지만, 솔직히 오케스트라 연주는 별로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끼리 훌륭한 합주를 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거든요.”

    • 김종훈 음악감독, 김영아 현악부장이 함께하는 한빛예술단의 연습

      김종훈 음악감독, 김영아 현악부장이 함께하는 한빛예술단의 연습

    • 네이버에서 진행된 장애인 인식개선 콘서트

      네이버에서 진행된 장애인 인식개선 콘서트

    “한빛예술단을 만난 후 일하며 느끼는 행복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회에서 시각장애인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이 정말로 적은데,
    이런 기회를 만들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해요.”

    그렇지만 2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온 예술단에는 엄청난 실력자들이 숨어있었다. 은빈 단원은 자신이 얼마나 게으르게 음악을 했는지를 깨닫고 반성하는 시간도 가져야 했다고.
    “우리 단원들은 진심으로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고, 한 번 음원을 들으면 바로 연주가 가능한 절대음감을 지닌 실력자들도 많았어요. 정말 큰 충격이었고, 엄청난 자극이 됐죠.”
    실제로 예술단 단원들은 대부분 점자 악보를 사용하기보다는 녹음된 음원을 듣고 외우는 방식을 택한다. 문제는 지휘자를 볼 수 없고, 연주 중 악보를 훔쳐볼 수도 없기에 다른 사람의 음원까지 완벽하게 외워야 한다는 점이다. 또한 어떤 파트에서 어떤 느낌의 연주를 할지 적어둘 수도 없기에 음악을 머리와 마음으로 완벽하게 이해해야 한다.
    “시각에 의존하지 않으면 다른 감각이 더 예민해지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우리 단원들은 정말 귀가 좋아요. 여기에 오기 전에는 제 귀가 훌륭하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에 들어와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은빈 단원의 말이다.

  • 음악과 계속 함께하는 꿈

  • 여전히 소년 같은 미소를 짓는 트롬본 연주자이자 예술단 내 ‘브라스 앙상블’ 악장을 맡고 있는 박진혁 단원은 합주를 사랑한다. 지난해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최한 20주년 공연의 감동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 공연은 그간 우리 예술단을 도와주셨던 많은 분들을 모시고 진행됐어요. 감사한 마음과 덕분에 우리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느낄 수 있어서 정말 가슴 벅찼어요.”
    그는 한빛예술단을 더 널리 알리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 예술단의 음악을 한 명이라도 더 많은 관객에게 들려주고 싶다. “BTS의 ‘다이너마이트’ 연주를 좋아합니다. 클래식과 가깝지 않았던 관객들도 아는 음악을 색다르게 접하면 열린 마음으로 듣는 것 같아요. 청자의 즐거움이 느껴지면 저 역시 기쁘니까요. 그리고 우리 음악이 널리 알려지다 보면 장애인 인식 개선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김은빈 단원은 음악을 사랑하는 좋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어 만족스럽고, 앞으로도 지금 이대로였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우리 단원들은 이전에 밖에서 만난 사람들에 비해 훨씬 더 순수하고 좋은 사람들이에요. 실명 후 알게 된 부분인데 표정을 잘 숨기는 사람들은 많지만, 목소리를 숨기는 사람들은 적거든요. 목소리만 들어도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어요. 그리고 우리 단원들은 정말 좋은 목소리들을 가지고 있죠.”

    • 장애인인식 개선 교육 강의를 하고 있는 박진혁 단원

      장애인인식 개선 교육 강의를 하고 있는 박진혁 단원

    • 2022년 9월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공연 ‘Music in the Dark: Ballare’

      2022년 9월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공연 ‘Music in the Dark: Ballare’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며 하나의 소리를 빚어내는 우리!”

    • 음악감독 김종훈

      음악감독
      김종훈

    • “우리의 진심이
      관객에게도 힘이 되길…”

      8살에 바이올린을 시작했고, 고3 땐 전국 콩쿠르에서 1등을 해 문교부 특기자로 한양대 음대 장학생으로 입학했습니다. 졸업 후 독일 베를린 국립음대를 졸업했습니다. 그때 만난 아내가 김영아 현악부장입니다. 단원들에게 항상 고맙습니다. 어려운 조건에서도 누구보다 간절하게 좋은 음악을 위해 노력하고 있고, 그러한 진심이 관객에게도 전달되길 바랍니다.

    • 제2바이올린 이영주

      제2바이올린
      이영주

    • “느리더라도 계속해서
      성장하고 싶어요”

      한빛예술단에서 제2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비록 성인이 되어 시작했지만 바이올린은 제 인생의 첫 악기이자 유일한 악기예요. 한빛예술단에 대한 TV 다큐를 보고 이곳에 들어오게 되었어요. 늦게 배운 만큼 더 열심히 하고 있어요. 느리더라도 계속해서 성장하는 연주자가 되고 싶어요.

    • 트럼펫 김은빈

      트럼펫
      김은빈

    • “한빛예술단에 들어오는 것이
      제 꿈이었어요”

      트럼펫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했어요. 음악을 전공하고 연주 활동도 하고, 아이들도 가르치다가 29살에 고혈압 합병증으로 실명했습니다. 이후 친구의 추천으로 한빛예술단에 대해 알게 된 후 이곳에 들어오는 게 제 꿈이었어요. 좋은 분들과 함께 다시는 할 수 없을 줄 알았던 음악을 하게 되어 행복합니다.

    • 트롬본 박진혁

      트롬본
      박진혁

    • “한 팀을 이루고 하모니를
      이룬다는 것이 좋아요”

      초등학생 때부터 한빛맹학교를 다녔고, 성장하면서 진로 고민을 정말 많이 했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트롬본을 접했고, 지금까지 트롬본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한빛예술단에서 가장 좋은 것은 우리가 각자 자신의 몫을 해야 하지만, 그것이 모여 한 팀을 이루고 하모니를 이룬다는 것이에요. 그건 정말로 아름답고 즐겁고 기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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