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 인 컬처
장애인은 꼭
가난하고 불행한가
글. 김헌식 / 대중문화평론가, 문화콘텐츠학 박사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시리즈 ‘더 에이트쇼’에는 다리에 장애가 있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생존게임 포맷의 이 드라마에는 왜 장애인 캐릭터를 넣었을까? 그리고 장애인 캐릭터는 꼭 이렇게 이용되어야 할까?
대개 생존게임 포맷의 콘텐츠는 불편하다.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해서 경쟁을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 고통과 죽음, 공포와 불안은 물론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작동하는 폭력과 지배 복종 등 권력의 작동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인간 본성의 바닥을 보여주는가 하면 인간성을 파괴하는 모습도 보인다. 일반적으로 이런 포맷에 장애인은 등장할 수 없다. 신체적 조건이 우월한 이들이 생존 경쟁에 나서는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에이트쇼’에는 장애인이 등장해 의아했다. 목숨을 내놓고 진행하는 생존게임 방식에서 장애인이 등장한다니 놀랍기도 하다. 더구나 죽는 사람은 없고, 누군가 죽으면 게임이 즉시 종료가 된다니 결말도 해피엔딩이 될 듯싶었다. 더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버티면 자동으로 돈이 적립되니 이보다 좋을 수가 있을까. 무엇보다 체류 시간을 늘리기 위해서 8명의 참가자가 모두 협력과 공조를 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뭔가 따뜻하고 인간애 넘치는 세상이 펼쳐지는 생존 쇼 무대가 기대된다. 그런데 관건은 시간의 통제권이 그들 8명에게 있지 않은 점이다. 결국, 시간을 통제하는 자가 진정한 권력자이며 부유한 자라는 명제를 여실히 느끼게 한다. 그것이 근원적인 비극이라는 점을 인식할 수 있었다. 이런 문제의식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장애인 캐릭터를 설정하고 묘사하는 방식은 세계관 차원에서 재고할 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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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장애인 캐릭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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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가질 질문은 ‘왜 더 에이트쇼에 장애인 캐릭터를 넣었을까?’ 이다. 장애인으로 등장한 1층(배성우)은 역시 생존게임에 적절하지 않았다. 그 발견은 우연이었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대로 시간이 돈이므로, 시간이 연장되어야 돈을 더 받는 상황에서 당연히 참여자들은 시간 연장 이유를 파악하려 했다. 곧 그들은 계단을 오르내릴 때 시간이 더 늘어나는 점을 파악한다. 실제로 참여자들이 힘들게 계단을 오르내릴수록 더 시간이 추가된다. 하지만, 여기에 다리가 불편한 1층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시간 연장에서 생산성이 낮은 이가 된다. 밥과 물을 똑같이 나눠야 먹어야 하는데 1층에게는 아까워하게 된다. 그래도 장애인 1층은 착하다. 계단 오르내리기를 잘못하니 다른 참가자의 배변 봉투를 보관해 주는 일을 자임한다. 즉 그는 스스로 환경미화원이 된다. 각 방안에서 발생하는 냄새 나는 분변 봉투를 보관해 주기로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여 질서를 만드는 데 이바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애초에 1층(배성우)이 숫자 1을 선택한 것은 다리가 불편해서가 아니었다. 그렇게 인식한다면 장애인 프레임에 오히려 갇힌 셈이다. 누구도 숫자 1부터 8이 자신이 살게 될 층을 의미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나중에 전체적인 드라마 내용을 살펴보면, 1층이 숫자 1을 선택한 것은 항상 자기가 최고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층은 최고층이 아니라 가장 하층이었고 8층이 가장 높고 돈을 많이 받았다. 출발선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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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론의 틀에서 장애인은 하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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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우연적 운명론의 틀에서 ‘더 에이트쇼’는 장애인이 우연한 기회에도 하층에 속하고, 그것을 바꾸려는 노력에도 결국 좌절의 굴레를 씌워 버린다. 1층은 말 그대로 시간에 따라 1만 원씩 적립되니까 8층에 비하면 말할 수 없는 수준이다. 매우 무력감을 느낀 1층은 다른 층으로 바꿀 수 있는지 묻는다. 그리고 10억을 모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초반 훈훈했던 참가자들은 1층의 예상 적립 액수가 가장 적다는 이유로 게임을 끝낼 시점을 1층이 10억을 모으는 시점에 맞추기로 했다. 하지만 1층은 그 돈으로 층수를 바꾸는 이른바 계층 이동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10억을 모은 1층이 마주하게 된 것은 처참한 좌절감이었다. 장애인은 하층에 머물러 있고, 그 계층 구조에서 탈출하기 위해 분투하는 캐릭터에 불과했다. 이는 장애인이 모두 가난하고 최하층에만 머무른다는 편견을 강화한다. 더구나 누구나 중도 장애인이 될 수 있는데 이 드라마 시리즈는 선천적인 장애와 빈곤을 필연적으로 연결 짓는다. 스토리 텔링도 이에 맞춰진다. 원래 1층은 서커스단에서 일하는 광대로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다. 특히 희소병에 걸린 딸아이의 병원비가 필요하지만, 돈이 없어서 병원에서조차 쫓겨난다. 이 때문에 그는 보험에 들고 일부러 사고를 당하려고까지 한다. 물론 그 계획은 실패했고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제안에 ‘더 에이트쇼’에 참여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그래도 가장 착하고 인간미가 있는 3층(류준열)조차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드러낸다. 특히 역량 면에서 1층을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한다. 3층은 1층이 계단 오르내리기를 잘 못한다는 이유로 다른 능력도 별로 없을 것이라고 전제했다. 이른바 후광 효과와 반대되는 악마 효과다. 하지만 1층은 서커스 마임 연기를 통해서 주목받고, 시간을 대폭 늘리는 역할을 해낸다. 어떻게 보면 3층은 장애인의 겉모습 때문에 편견을 가진 것이다. 장애인은 능력이 없다는 편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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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화된 캐릭터 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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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서커스는 유럽에서 장애인들을 내세워 만든 진기한 볼거리 쇼에서 기원했으니 1층의 직업 역시 유쾌하지는 않다. 몇 개 안 되는 서커스단. 희귀의 직업군에 1층이 있는 것은 동시대적 교감보다는 클리셰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1층의 최후는 더욱 유쾌할 수 없었다. 그나마 광대로서 표정 연기나 줄타기는 잘하는 것으로 그려진 1층이 줄에서 떨어져 사망하는 장면은 연출 필연인지 현실의 반영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위로 올라가고 싶었어요, 평생 밑바닥이었으니까.”
1층의 이 대사는 죽는 장애인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질 필요도 없게 만든다. 장애인의 죽음을 극적 장치로 활용하는 전형적 방식이기 때문이다. 한동안 없어졌던 이런 캐릭터에 대한 도구화된 설정이 글로벌 OTT에 등장한 것이다. 이 사실은 그만큼 문화적 오도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 환기했다. 그리고 이는 글로벌 OTT의 위험성을 의미한다. 글로벌 시장을 겨냥하기에 소수자에 대한 인식 등 세밀한 문제의식에 둔감해도 되는 것일까. 층 이동이 장애 극복을 뜻하는 걸까? 처음부터 여덟 사람이 잘 나눴으면 됐을 것이다. 참혹한 결말은 분명 1층의 탓이 아니다. 후반부에 이를수록 휴머니즘을 보인 ‘오징어게임’이라면 다르게 접근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