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베라는 남자 VS 오토라는 남자
영화 ‘오베라는 남자’와 ‘오토라는 남자’
영화 ‘오베라는 남자’(2016)는 원작인 프레드릭 배크만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지난해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오토라는 남자’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되었다. 지금부터 오베라는 남자와 오토라는 남자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글. 차미경 문화칼럼니스트
장애는 한 개인이 감당해야 할 시련일까
‘오베라는 남자’와 ‘오토라는 남자’, 주인공의 이름은 달라졌지만(물론 등장인물들의 이름도 조금씩 다르다) 전자는 스웨덴 영화이고 후자는 미국 영화이다. 두 영화는 배경만 다를 뿐 두 작품 모두 아내를 잃은 괴팍한 노인이 아내를 따라가기 위해 자살을 시도하지만, 매번 이웃 때문에 실패하는 원작의 스토리 라인을 따라간다. 그러나 내 눈에 가장 크게 보이던 오베라는 남자와 오토라는 남자의 결정적 다른 점이 있었다. 과연 무엇이었을까?
우선 오베라는 남자를 보자. 사고로 휠체어를 타게 된 그의 아내 소피. 그녀의 직업은 학교 교사였고 장애인이 됐지만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 어떤 학교도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다. 편의시설이 없는 학교에서 그녀가 휠체어를 타고 일 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이유였다. 일반 학교로 재취업이 어려움을 알게 된 소피는 학습이 부진한 아이들을 위한 특수학급의 교사로 지원한다. 그러나 그 학교마저 편의시설 부재를 이유로 그녀를 거부한다. 화가 난 오베는 곧바로 학교로 달려가 밤새도록 학교 계단에 나무 경사로를 만들기 시작한다. 결국 소피는 오베가 만든 경사로 덕분에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폭우를 무릅쓰고 아내를 위해 밤새 홀로 나무 경사로를 놓는 오베의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한 개인이 주는 감동이 사회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책임에 대한 직무유기를 얼버무리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 장애가 있는 교사를 위해 편의시설을 만들어야 할 책임은 장애 당사자인 소피나 그의 남편 오베가 아니라 그 학교에 있다. 한 개인에 대한 감동이 아니라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한 사회의 직무유기를 통감해야 한다.
“죽지 않으려면 죽을 만큼 버텨야 해.” 자신을 거부하는 학교를 끝내 포기하지 않으면서 오베의 아내 소피가 한 말이다. 오베와 그녀가 살아야 했던 시절은 그렇게 죽을 만큼 버티며 살아내야만 했다. 그러나 죽을 만큼 힘들게 혼자서만 버텨내야 하는 세상이라면 더는 희망이 없는 것 아닐까.
오토의 시선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
그럼 오토라는 남자는 어떨까. 오토라는 남자는 장애가 있는 아내를 위해 오베와는 좀 다른 싸움을 한다. 오베는 아내를 위해 학교 계단에 나무로 경사로를 놓느라 폭우 속에서 혼자서 애를 쓰지만, 오토라는 남자는 장애가 있는 사람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지역사회 모든 환경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마을에 콘도를 새로 짓고 인도를 새로 만드는 재개발이 한창이던 시절, 설계를 조금만 바꾸면 되는 일인데도 휠체어를 탄 사람은 쉽게 무시되는 현실을 오토는 목도하게 된다. 휠체어 탄 사람을 그저 ‘그런 사람들’로 묵살해 버리며, ‘나중에’라는 핑계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손쉽게 배제해 버리는 지역사회에 대해 오토는 분노의 목소리를 높인다.
장애인을 고려하지 않고 건물을 짓는 건설사, 부동산회사, 그리고 안전 점검을 무시해 아내의 사고를 유발한 버스회사와 버스기사와도 오토는 끝까지 싸워 보려고 한다. 그러나 아내 쏘냐가 말리는 바람에 투쟁을 계속하지 못하지만 어쨌든 오토의 대응은 오베와는 다른 것이었다. 오베라는 남자는 단지 아내의 학교만 바꿀 수 있었지만, 오토라는 남자의 투쟁은 그가 사는 지역사회에 더 많은 변화를 이끌 수 있었을지 모른다. 단지 몇 장면에 그치는 작은 차이 같지만 오베라는 남자는 장애를 한 개인이 감당해야 할 시련이나 역경으로 받아들였고, 오토라는 남자는 장애를 한 개인이 아니라 사회가 감당해야 할 책무로 보았다.
장애인도 함께 살자고, 장애인도 자유로이 이동하고 일하고 싶다고, 아직도 목이 터지도록 외쳐야만 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에서 이제 우리도 오토처럼 좀 더 적극적인 시선이 필요하다. 더욱더 절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