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AD 웹소설

『고양이 눈 키스』

3화, 후배 놈이 상사인 건에 대하여

글. 김뜰
뇌병변장애를 가진 작가로 영화, 웹소설, 웹드라마, TV 드라마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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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영이

    고영이 (23세~29세)
    뇌병변장애, 대학생~광고영상업체 신입사원

    휠체어 사용 장애인. 가만히 앉아 있으면 장애인으로 보이지 않지만 움직이면 굳은 몸동작이 드러나고 말하는 것 역시 약간 어눌하다. 그러나 웃는 얼굴로 ‘팩트폭행’을 서슴지 않는다. 일하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사회생활 경험이 적고 인간관계도 좁아 사람들에게 오해를 사는 경우가 많다.


  • 노훈·그 XX

    노훈·그 XX (21세~27세)
    대학생~광고영상업체 팀장

    태어나서 장애인을 본 게 고영이가 처음이다. 나쁜 의도가 있어서라기보다 잘 모르고 서툴러서 실례를 저지르는 스타일.
    머리도 좋고 일머리가 있어서 이른 나이에 일찍 승진했다. 약 서너 번 해 본 연애가 전부이고 외동아들이라 여자를 잘 모른다.


  • 송해린

    송해린 (25세)
    광고영상업체 디자이너

    입사 2년차. 사수였던 노훈을 좋아하는 중이고, 노훈도 이를 알고 있다.
    착한여자 콤플렉스가 있는 편이다.


  • 구동혁

    구동혁 (27세)
    광고영상업체 편집 PD

    노훈과 고교 동창, 군대 동기 사이다. 눈치가 매우 빠른 편이고, 분위기 파악에 능하다.
    서로 비난과 험담이 주 대화지만, 노훈의 대나무숲이 되어 주는 존재다.


노훈·그 XX “안녕하세요! 신입사원 고영이씨죠? 팀장 노훈입니다. 환영해요.”

사람 좋은 미소로 생글거리며 웃고 있지만 생색내고 싶은 단어마다 강조점을 쾅쾅 찍어 누르는 게 느껴졌다. 영이는 너무나 뜻밖인 상황에 놀라 전동휠체어 컨트롤러 위로 손을 털썩 떨어뜨렸다. 그 바람에 의도치 않게 휠체어가 작동해 훈을 들이받을 뻔했고, 훈은 화들짝 놀라 불에 데인 듯 뒷걸음질 쳤다.
영이는 “헙! 죄, 죄송합니다.” 정신 차린 손가락을 놀려 휠체어를 뒤로 빼 바로 세웠다. 제발 이 상황이 한낮의 꿈이길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이 모든 광경은 현실 그 자체였다.

노훈이 수장인 광고제작팀 멤버는 영이를 제외하고도 2명이 더 있었다. 각종 공공기관, 중소기업들이 요청하는 광고영상제작에 있어 디자인파트를 맡는 2년 차 선배 송해린과 영상 사운드 및 편집을 맡는 4년 차 선배 구동혁이 바로 그들이었다.
루즈한 와이셔츠를 딱 붙는 H라인 스커트 허리에 잘록하게 집어넣은 스타일링, 백화점 1층 매장에서 항상 풍기는 럭셔리한 향수 냄새, 다이슨 헤어드라이기로 세팅한 듯 걸을 때마다 탄력 있게 통통 튀어오르는 머리칼의 송해린 선배도 그렇고.
대충 막 입은 듯 보여도 오픈카라 니트와 슬랙스 팬츠 색상을 톤온톤으로 맞춘 거 하며, 톡 튀는 포인트 양말에 브러시드 가죽로퍼를 신어 단조로움을 피한, 조목조목 뜯어보면 감각적 세련됨이 느껴지는 패션의 구동혁 선배도 그렇고.

트렌드에 민감한 광고 일을 하려면 적어도 이 정도 스탠스는 취해 줘야 하는 거예요, 하는 것이 으름장처럼 느껴져 영이는 묘한 위화감 속에 의기소침해졌다. 하다못해 불과 며칠 전에 봤을 땐 고리타분 노땅처럼 보였던 노훈의 패션, 어깨가 과하게 박시한 지금의 재킷조차 레트로한 매력을 다분히 의도한 코디인 것 같아 킹받을 지경이었으니.
노훈은 그런 영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얌체마냥 “앞으로 고영이씨는 광고 기획 담당이 돼서 광고 콘센트 잡는 일을 해 주셔야 할 겁니다. 잘하실 거라 믿어요” 하고 또 한번 둥글게 눈을 휘었다.

첫 출근 날엔 누구나 그렇다고들 하지만 영이도 낯선 책상에 자리 잡고 앉아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몰라 뻘쭘하게 미어캣 모드가 되어 두리번거리다가 오전시간을 다 보냈다. 그렇게 어영부영 맞이한 점심시간. 각 부서의 직원들이 우르르 일어나 사내식당으로 향하는 분위기였다. 영이와 문득 눈이 마주친 노훈이 아니나 다를까 일어서서 요란하게 박수를 짝짝치며 집중을 유도하더니 직원들에게 외쳤다. “우리 고영이 씨 장애우시니까 돌아가면서 식사 좀 도와드립시다!”
‘와아, 저 놈 또 시작이네.’ 눈가 핏줄이 파르르 떨리는 영이가 거북이에 빙의해서 직원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치고 연신 목을 넣었다 뺐다 눈인사를 해 댔다.

해린 선배가 식판을 대신 받아 주고, 동혁 선배가 수저를 가져다 주고. 사내식당 한켠에 자리 잡은 영이가 뜨끈한 육개장 국물을 한 모금 떠먹으며 식사를 시작하려는 순간이었다. 노훈이 영이와 마주보는 정면에 식판을 놓고 마주 앉았다. 영이는 쿨럭쿨럭, 매콤한 육개장 국물이 코로 넘어가 따끔거리고 쓰라려 인상을 찌푸렸다. 센스있는 선배들이 휴지와 물을 가지러 자릴 비운 사이, 쿨럭대건, 코가 따가워 죽을 지경이건, 훈이 아주 궁금해 죽겠다는듯 물었다.

노훈·그 XX “고영이 씨, 저 진짜 몰라요? 한국대학교 경영학과 노훈? 한국대 나오셨잖아요. 이력서 봤는데?”

영이는 거푸 쿨럭이면서도 양손을 휘휘 손사레치며 절대 모른다고, 모른다고. 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흘겨보며 “에이, 모를 리가 없는데? 왜 모르는 척하는 거지? 도통 모르겠네?” 영이 앞에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영이는 흠칫, 간신히 사그라든 기침을 뒤로 하고 대답했다. “한국대면 다 노훈 씨를 알아야 합니까? 어유, 자뻑이 좀 있으신가 봐?”
그러자 훈이 뭐 그럴 수 있다는 듯 입술을 삐죽대고 어깰 으쓱, 여유있는 제스처로 끄덕이더니 또 한번 싱긋 웃으며 하는 말. “근데 노훈 씨가 아니고 팀.장.님. 그리고 ‘있으신가 봐?’ 반말은 좀 듣기 거북하네요. 오케이?”
영이는 뒷목 스트레칭을 한 것도 아닌데 우두둑 뼛소리가 나고, 찌릿찌릿 전기가 통하는 기분이었다. ‘와아, 이걸 어떡하지? 이 놈 죽이고 지옥행 티켓을 끊어, 말어?’
쫄깃한 긴장감 속에 영이와 훈의 시선이 얽혀 스파크를 일으키려던 그때, 해린과 동혁이 돌아와 두 사람의 대화는 급정거하고 말았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사무실에 복귀한 영이는 이대로 가만히 앉아만 있어선 안 되겠다 싶어 선배 해린과 동혁의 자리를 찾아가 시키실 일이 있으면 뭐든지 시켜달라고, 인생 최대치의 사회성을 발휘했다.

적극적인 영이 태도에, 해린은 자료 복사 좀 해 달라, 동혁은 비품실에 가서 스테이플러 심을 좀 가져와 달라고 지시했다.
영이는 두 주먹 불끈, 나섰지만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으니.
복사기는 출력버튼이 너무 높이 있어 영이 시선에서 보이지도, 손이 닿지도 않았고, 비품실 팬트리에는 물건들이 너무 겹겹이 높이 높이 쌓여 있어 낮게 앉은 위치의 영이가 아무리 팔을 뻗어도 빼낼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훈이 지나가다가 어려움에 처한 영이를 발견하고 도와줬다. 문제는 꼭 사무실에 돌아와 팀원들에게 “장애우가 할 수 있는 일을 줘야 할 것 아니에요. 그게 어렵습니까?”, “고영이 씨는 장애우예요, 장애우! 알 만한 사람들이 참네, 일부러 그러는 거야, 뭐야? 숙지 좀 하십시다!” 하며 생색낸다는 것.

영이는 한계를 느끼고 꺾여 버린 오늘 하루가 쇼츠 영상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며 자괴감과 짜증, 화가 치밀었다. 아슬아슬 위태롭던 영이의 감정 폭탄은, 엉뚱하게도 ‘장애우’를 들먹거리는 노훈 저 놈의 말본새 때문이라고. 화의 불길이 옮겨붙고 말았다.

고영이 “장애우, 장애우, 장애우! 내가 왜 우리 모두의 친구예요? 7,80대 할아버지 할머니께도 장애가 있으면 장애우라고 하실 겁니까? 장애인입니다! 장애‘인’! 사람이라고!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이 아무리 변하지 않는 거라지만, 이건 뭐 무식한 건지, 개념이 없는 건지... 어휴...”

쇼미더머니 래퍼가 목걸이를 갈망하듯 속사포처럼 쏟아 내는 영이의 말에, 해린과 동혁이 얼어붙어 동작 그만이 됐는데, 그닥 놀랍지도 않다는 얼굴로 노훈이 피식, 영이를 향해 나직하게 한마디 툭 던졌다.

노훈·그 XX “거봐, 나 알잖아.”

일러스트. 나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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