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입은
대만의 장애인고용 정책
글. 이정주 / 경기도장애인복지종합지원센터 누림 센터장
대만은 막강한 중소기업과 함께 비약적인 성공을 이루어 나가고 있는 국가다. 그러나 굉장한 경제발전에도 불구하고 사회복지 정책은 미흡한 수준인데, 그런 대만이 지원을 아끼지 않는 분야는 바로 장애인고용이다. 대만 장애인고용의 핵심은 비호공장(庇護公場)으로, 민간법인과 정부와 지자체의 협력을 통해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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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금성 장애 수당에 인색한 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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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의 성장이 눈부시다. 4차 산업의 총아, 반도체 분야를 이끌어 가는 대만이다. TSMC, UMC, 노바텍, 미디어텍, 신텍 등 설계부터 제조, 패키징, 테스트 반도체 전 과정을 운영할 수 있는 세계 유일의 국가이다. 그뿐 아니다. ASUS, MSI 등 컴퓨터 업체는 물론이고 애플의 아이폰을 전량 생산하는 폭스콘(Foxconn Technology Group)도 대만 업체이다. 비록 삼성, LG, 현대와 같은 세계적인 대기업은 없지만 최첨단 핵심기술을 보유한 강한 중소기업이 즐비한 대만은 이들 기업과 함께 비약적인 성공을 이루어 나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발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취약계층을 위한 사회복지 정책은 여전히 미흡한 수준이다. 첨예한 미중 갈등 속에서 마음 놓고 샴페인을 터뜨릴 수 없는 지정학적 이유도 있고, 중국 공산당 사회주의와 대척점에 있는 자유주의 체제의 첨병으로서, 사회주의 냄새가 짙은 보편적 복지를 채택하기는 어려운 정치적 입장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대만은 현금성 소득지원, 무기여 수당 등 공적부조는 경제 성장이 무색할 정도이다.
장애인 복지 또한 마찬가지다. 2022년 1인당 국민총소득(GNI) 3만3,624달러로, 결코 적지 않다. 그럼에도 대만에서는 장애인 지하철, 버스 요금 할인이나 공공시설 이용료 감면 제도는 찾아보기 어렵다. 기초수급액 안에 저소득 장애인을 위한 장애연금은 빠져 있다. 지자체 중 한 곳은 보충적으로 지급하고 있다지만 소득이 전무한 중증장애인에게만 해당될 뿐이며 액수도 적다1. 어느 국가와 비교해도 대만의 현금성 장애 수당은 매우 인색한 편이다.분류 유형 1 신경계의 정신 기능 및 구조 2 눈, 귀와 관련된 구조, 감각기능 및 통증 3 목소리와 말하기와 관련된 구조 및 기능 4 순환기, 혈액, 면역 및 호흡기계와 관련된 구조 및 기능 5 소화, 신진대사 및 내분비계와 관련된 구조 및 기능 6 비뇨생식 및 생식계와 관련된 구조 및 기능 7 신경·근·골격 및 이동과 관련된 구조 및 기능 8 피부와 관련된 구조 및 기능
1 월 2,000TWD(8만 원)에서 4,000TWD(17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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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고용에는 아낌없는 지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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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대만은 유독 장애인 일자리 창출과 장애인고용에는 지원을 아끼지 않는 편이다. 2012년 장애인등급제를 폐지하고 ICF 기반의 장애판정 도구를 도입했는데 [표]와 같이 8개 유형으로 기능을 분류하면서 이를 직업적 장애 기준의 발판으로 삼았다2. 장애인 일자리와 고용에 대해 관심을 보여 주는 지점이다. 그중 일자리 창출을 위해 대만이 집중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직업재활시설과 같은 비호 공장(庇護公場)이며, 대만 장애인고용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설립과 운영주체는 민간법인(Welfare foundation)이고 정부와 지자체는 다양한 지원을 담당한다. 토지임대, 임대료, 인건비, 세금감면 등도 있고 만들어진 생산품 우선구매 비율도 5% 이상으로 정해져 있다. 결코 적지 않은 규모다. 그런데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비호공장을 설립하는 법인의 자세이다. 우리나라 시설은 ‘어떻게 충분한 정부지원을 받을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면, 대만의 법인은 ‘어떻게 정부로부터 독립할 수 있을까?’에 초점을 둔다는 점이다.
설립 초기 단계에서 정부 지원을 받았더라도 하루 빨리 정부 지원 없이 자립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시장 수익을 높이거나 또는 기부를 많이 받아 장애인 근로자에게 최저임금 이상의 월급도 주고, 수익금으로 지역사회를 더 돕고 싶어 한다. 심지어 법인의 비전에 정부 지원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로드맵을 제시하는 경우도 있고, 정부 지원 없이 장애인 고용에 홀로 섰다는 일은 자랑거리가 되기도 한다. 대만을 대표하는 빅토리아 복지법인(Victoria Welfare Foundation)이 그렇고, 시민사회와 함께 국민 모금으로 안면 기형 장애인의 일자리를 만들어 낸 양광(陽光) 복지법인도 그런 법인 중 하나이다.
양광 복지법인의 비호공장
‘양광 자동차 세차장과 양광 주유소’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에 있는 양광 복지법인이 운영하는 비호공장이다. 1997년 갑작스런 폭발사고로 일그러진 얼굴만 남은 어느 여성 대학생의 자서전 ‘伯見陽光的人(햇볕을 보지 못하는 사연)’에서 안면 기형 장애인의 일자리가 시작된다. 참혹해진 외모와 비참해진 삶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은 그를 위해 양광법인은 후원금을 모았다. 지자체는 고가도로 밑 그늘진 공간을 내어 주었고 거기서 안면장애인의 세차장이 열렸다. 소식을 들은 타이베이의 택시기사들은 앞 다투어 세차를 맡겼다. 장애인 세차원은 열심히 일했고, 고객과 매출이 덩달아 늘었다. 월급도 최저임금 이상으로 올랐다.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후 세차장과 주유소는 장애 학생을 위한 현장실습 직업훈련장이 되었고, 매년 수익금의 일부는 안면장애 인식개선을 위한 공연기금에 투입하고 있다. 시민사회와 지자체가 힘을 모아 민관협력으로 장애인 일자리 창출을 성공적으로 이룬 대표적인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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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복지법인의 비호공장
‘타이베이 빅토리아 심신장애인 능력개발센터 부설 빅토리 주유소’빅토리아 복지법인은 ‘더 많은 수익을 올려 정부지원 없이도 장애인을 고용하는 법인이 되겠다’는 뜻을 세운 대만의 유명한 복지법인이다. 빅토리아 복지법인이 설립한 비호공장에서 일하는 종사자는 200명, 장애인 근로자는 160명이다. 법인의 대표 비호공장은 ‘타이베이 빅토리아 심신장애인 능력개발센터 부설 빅토리 주유소’라는 비호공장이다. 연간 6억 대만달러(TWD), 한화로 약 250억 원의 매출을 올린다. 타이베이 시내 고가도로 밑에 자리 잡은 이 주유소는 24시간 영업을 하고, 전체 직원 60명 중에 장애인 직원은 40여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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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규모 비호공장을 운영할 수 있는 재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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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도 비호공장으로 운영하고 있다. 신배시에 있는 패밀리마트 편의점이다. 매장 안에 들어서면 정면에 신배시 비호(보호)공장이라는 간판이 눈에 띈다. 편의점에는 16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고 장애인 직원은 9명이다. 청각, 지적, 정신장애 유형으로 나뉘어 있다. 하루 24시간 3교대로 일을 하며, 장애인 직원은 늦어도 밤 11시까지만 일하고, 야간에는 비장애인이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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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중증 지적장애인은 물건 진열하는 일을 하며, 경증 지적장애인과 구화 가능한 청각장애인은 손님을 상대하고, 돈을 주고받는 계산원을 맡는다. 매출이 아직 높지 않지만 직원 임금을 겨우 맞출 수 있는 건 지자체의 임대료 지원 때문이다. 이렇게 임대료 지원 덕분에 운영이 가능한 비호공장은 편의점 외에도 시청 안에 있는 카페테리아, 유리공예점, 인쇄소 등이 더 있다. 지역사회 장애인 고용을 위해 임대료 지원 또는 무상임대 사업은 소규모 비호공장에게 요긴한 재정지원이며, 대만 장애인 고용제도 중 우리나라 지자체들도 도입할 만한 제도라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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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관협력으로 성장한 장애인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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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타이베이는 산하 기관들을 대상으로 포상금을 걸고 장애인 생산품 구매 경진대회를 연다고 한다. 포상 기관도 좋겠지만 실제로는 영업이익이 오를 비호공장이 더 큰 이득인 셈인데 지자체의 섬세한 배려에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빅토리아 복지법인 관리자 창 씨는 지자체 지원에 감사한 것도 사실이지만 빅토리아 복지재단의 궁긍적인 목적은 정부의 도움 없이도 시장에서 성공하는 것으로, 자신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스스로 노력해서 시장에서 돈을 벌 수 있을까”라며 법인의 설립의지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
대만은 우리나라와 정치적, 경제적으로 매우 흡사한 상황이지만 해결 방식은 참으로 다르다. 기술 중심의 중소기업, 뜻밖에 강한 자유로운 개인주의, 겉치레보다는 실속을 더 차리는 문화, 미국달러와 연동하는 타이완달러(TWD)의 힘 등, 조용하지만 단단한 심지를 엿보게 된다. 우리의 관심 밖이던 대만이 불쑥 반도체, 모바일 기술 일등 국가 되었다. 장애인고용도 사실 좀 놀랐다. 언제부터 시민과 사회, 정부가 힘을 모아 민관협력 생태계를 조성했을까. 정부가 억지로 주도 하지 않아도 민간에서 장애인 일자리를 만들어 가는 노하우를 키워 냈다. 우리가 이니셜 ‘K’로 으쓱하던 중 어느새 대만이 반도체 강국으로 불쑥 솟아올랐듯, 대만식 탈복지국가 모델이 곧 우리 앞에 우뚝 서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