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 인 컬처
아이유의 Love wins all
장애 해석은
어떻게 해야 할까?
글. 김헌식 / 대중문화평론가, 문화콘텐츠학 박사
다양한 화두가 농축되어 있어, 여러 해석을 가능하게 한 아이유의 ‘Love wins all’. 그런데 이 뮤직비디오에는 장애에 대한 오해를 낳을 수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장애인이 등장하는 설정이 아닌 그 표현에 대해 짚어 봐야 한다.
아이유의 ‘Love wins all’ 뮤직비디오는 한 편의 영화와 같았다. 시네마 뮤직비디오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상징과 은유가 가득해서 보는 이에 따라 해석의 여지가 있다. 다양한 화두가 농축되어 있는데, 가수 아이유와 방탄소년단 뷔의 캐릭터도 포함된다. 두 사람이 장애인 캐릭터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뮤직비디오 속 아이유는 입말을 할 수 없고, 뷔는 눈동자의 색깔에서 알 수 있듯이 시각 장애를 갖고 있다. 물론 이러한 설정 자체가 문제가 될 리는 없다. 다만, 장애를 바라보는 관점을 잘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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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큐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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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비디오는 미래의 어느 날 난데없이 거대한 큐브(Cube)에 쫓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장애 유형이 다른 두 사람이 연인으로 등장하는 듯한 장면은 다른 뮤직비디오에서 잘 볼 수 없는 설정이다. 그들은 도망가는 와중에 서로 소통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노래의 제목을 연상한다면 사랑의 힘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뮤직비디오에서 장애인이 차별받는 세상을 암시한 것은 타당하다. 큐브는 정육면체의 입방체를 뜻하는데 이것이 상징하는 점은 특정 사물이나 대상을 구획하는 인식적 체계다. 프레임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으며, 차별이나 왜곡된 인식을 말한다. 싱어송라이터 유영석의 ‘네모의 꿈’을 보면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왜 세상은 하나 같이 사각형인가, 둥그럴 수는 없는지 묻는 이 노래는 많은 깨달음을 전한다. 큐브는 장애학의 관점에서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을 의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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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코더 속 세상은 장애를 극복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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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비디오의 논란은 캠코더에서 비롯한다. 쫓겨 들어간 폐건물에서 큐브를 잠시 따돌린 두 사람은 캠코더 하나를 발견한다. 이 캠코더는 다른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창 역할을 한다. 요컨대, 차별과 편견에 시달리던 이들이 세상의 눈을 피해 도망치고 그 공간에서 자신들 나름의 자유를 캠코더를 통해서 상상하는 내용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이들은 캠코더를 매개로 그 안에서 각자 턱시도와 하얀 드레스를 입는 것은 물론 만찬을 즐긴다. 곧이어 둘만의 식사가 아니라 세상 많은 이들과 어울리는 흥겹고 즐거운 연회가 된다. 이상적인 그들의 소망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창으로 바라보는 아이유와 뷔의 모습이 현실과는 매우 다르다. 청각장애인이 아니며, 시각장애도 없이 즐겁고 행복한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이는 장애에 관한 오해를 낳을 수 있다는 지적으로 이어졌다. 왜 그럴까? 장애가 극복의 대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장애가 없는 상황을 원하는 심리를 드러내었는데, 장애인의 현실은 장애의 극복이라든지 장애의 제거가 아니라 장애와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이다. 많은 장애인이 장애와 함께 생활을 영위하기에 그 자체를 극복이나 제거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장애인들의 관점과 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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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차별에 희생당한 이들의 옷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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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에 대한 해석은 여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다시 뮤직비디오로 가 보자. 비록 상상이었지만 이때 분위기가 너무 소란스러웠는지 두 사람은 큐브에 발각되고 만다. 다시 쫓겨 도망가게 된 두 사람은 건물도 뚫고 들어오는 큐브의 위협에 막다른 구석에 몰리게 된다. 마지막으로 큐브를 향해 필사적으로 항거하지만, 곧 그들은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큐브를 바라만 본다. 그러고는 배터리가 소진되는 캠코더의 화면 속에서 두 사람은 하늘로 날아가는 모습으로 비친다. 곧 공중에서 그들이 입었던 드레스와 턱시도가 떨어지고 건물 초입에서 봤던 옷의 무덤 위에 흩뿌려져 쌓인다. 이 장면은 방탄소년단의 ‘봄날’ 뮤직비디오에서도 오마주했다. 즉, 크리스티앙 볼탕스키(Christian Boltanski, 1944~2021)가 2010년 파리 그랑팔레의 기획전에서 선보인 ‘페르손(Personnes)’이라는 작품을 연상할 수 있게 했다. 크리스티앙 볼탕스키는 이 작품을 통해서 삶과 죽음의 허무함을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헌 옷은 삶의 흔적을 말한다. 많은 옷이 무덤의 형태를 갖추고 있기에 집단 학살이라는 해석도 있다. 집단 학살이든 개인의 죽음이든 남은 것은 옷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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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화려한 옷을 남기고 그들은 사라져 가는데, 그것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환상이든 현실이든, 부자든 가난한 이들이든,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옷을 남기는 법이다. 남은 옷들은 같은 취급을 받는다. 크레인은 옷을 들었다가 놓는 것을 반복하고, 이에 대해서 큐브라는 세상의 차별과 편견에 시달린다고 해도 그들은 자유롭게 해방되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심지어 지구가 아니라 화성으로 갔을 것이라는 해석도 덧붙인다. 어쨌든 옷을 남기고 사라진 것은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관점에서는 죽음이라는 것을 달리 해석할 수는 없다. 지구에서는 사라지고 우주로 갔다는 것은 별이 된 셈이다. 낭만적으로 표현하기는 했지만, 결국 세상의 편견과 차별로 희생당한 이들을 생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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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뮤직비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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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다른 방향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다. 일단 캠코더는 추억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스마트모바일 시대에 캠코더가 더는 현재가 아니라 과거의 물건이라는 점 때문이다. 옷의 무덤도 사랑의 힘으로 편견과 차별을 극복한 흔적이라고 해석을 내리기도 한다. 큐브가 내포하는 네모는 편견이나 차별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노화라는 해석도 있다. 장애는 결국 자연스러운 노화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라는 점이다. 나아가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강조한 뮤직비디오라는 결론을 내리는 셈이다. 중도 장애라고 할 때 반드시 사고 때문만을 의미하지 않을 수 있다. 고령화 시대에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세상은 장애의 보편화다.
하나의 정답 같은 해석은 없다. 장애를 부정적으로 표현할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장애를 등장시킨 것만으로도 진일보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관건은 의도와 관계없이 그것이 다른 맥락과 뜻으로 현실을 달리 규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선한 의도와 악한 결과가 나오지 않도록 유의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