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AD 웹소설
『고양이 눈 키스』
9화, 돌아온 불도저
글. 김뜰
뇌병변장애를 가진 작가로 영화, 웹소설, 웹드라마, TV 드라마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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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이 (23세~29세)
뇌병변장애, 대학생~광고영상업체 신입사원휠체어 사용 장애인. 가만히 앉아 있으면 장애인으로 보이지 않지만 움직이면 굳은 몸동작이 드러나고 말하는 것 역시 약간 어눌하다. 그러나 웃는 얼굴로 ‘팩트폭행’을 서슴지 않는다. 일하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사회생활 경험이 적고 인간관계도 좁아 사람들에게 오해를 사는 경우가 많다.
노훈·그 XX (21세~27세)
대학생~광고영상업체 팀장태어나서 장애인을 본 게 고영이가 처음이다. 나쁜 의도가 있어서라기보다 잘 모르고 서툴러서 실례를 저지르는 스타일.
머리도 좋고 일머리가 있어서 이른 나이에 일찍 승진했다. 약 서너 번 해 본 연애가 전부이고 외동아들이라 여자를 잘 모른다.
구동혁 (27세)
광고영상업체 편집 PD노훈과 고교 동창, 군대 동기 사이다. 눈치가 매우 빠른 편이고, 분위기 파악에 능하다.
서로 비난과 험담이 주 대화지만, 노훈의 대나무숲이 되어 주는 존재다.
변태호 (27세)
카페사장고영이와 초등학교 때부터 같은 반이었고 고영이 휠체어 전담 드라이버였다. 영이를 좋아하는 맘도 있는데 친구 사이가 어색해질까 봐 감추고 있는 상태.
영이와 티키타카가 좋다.
송해린 (25세)
광고영상업체 디자이너입사 2년차. 사수였던 노훈을 좋아하는 중이고, 노훈도 이를 알고 있다.
착한여자 콤플렉스가 있는 편이다.
우지선 (29세)
간호사고영이와 초등학교 때부터 단짝이었고, 고영이의 화장실, 식사, 목욕 등등 브래지어 끈까지 올려 줄 정도로 도와줘 보지 않은 게 없다.
영이가 누구보다 믿고 의지하는 친구. 영이를 좋아하는 태호를 좋아한다.
“할게요. 제가 직접.”
마음 졸이고 두근댔던 게 민망해질 만큼 영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훈의 기대와 다른 것이었다. 앙다문 입이며, 꼭 쥔 두 주먹, 끄덕이는 고갯짓까지. 결의에 찬 영이가 바라는 건 훈의 고백에 대한 대답도, 연애하자는 것도 아닌 달달커피 광고주를 설득해 계약을 따오겠으니 자신의 푸시를 상사로서 허락해달란 부탁이었다. 실망한 기색을 잠시 감추고 훈은 이미 다 정리된 일이니 더 이상 신경 쓰지 말아라, 맡은 바 업무에만 집중하라 했지만 영이는 물러날 기미 따위 보이지 않는 불도저였다.
훈은 처음엔 기대했던 대답이 아니었던데 대한 약간의 짜증을 섞어, 다 끝난 사안을 왜 들쑤시냐, 상사의 결정을 따라야 하는 거다, 호통도 쳐보고, 회유하며 달래도 봤지만, 전혀 굴하지 않고 왜 자신이 설득할 수 있는지, 해야만 하는지, 옆눈을 가린 경주마처럼 끊임없이 빌드업을 해나가는 영이 모습에, 문득 예전 대학 선배 고영이를 다시 만난 듯한 기분이 들어 피식 웃음이 터졌다.
훈이 느낀 기분은 단순히 느낌이 아니었다. 사실 오늘 아침 영이는 일어나자마자 태호의 전화를 받았었다. 수동휠체어로 전환도 못 시키는 사람과 술을 마시면서 그렇게 대책 없이 만취하는 건 대체 무슨 정신머리냐는 잔소리와 함께, 훈이 달달커피 계약 불발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영이가 상처받을 게 싫어서 자기가 먼저 차단했다고, 하지만 앞으로 업무평가도 있을 테고, 여러 가지로 불이익을 받게 될 영이가 너무 걱정이란 말을 했다고.
태호의 말을 전해 듣는 동안 지난밤, 훈의 재채기 같은 사랑 고백도 떠올랐고, 상처받을 게 싫어서, 라는 훈의 찡한 마음도 깨달았지만, 영이 머릿속에 훨씬 더 강력하게 박히는 워딩이 있었다. ‘업무평가 불이익’. 입사한 이후로 취업에 드디어 성공했다는 기쁨에 취해 있느라 잊고 있었다. 회사 생활은 정글이고, 그 정글에서 생존하기란 일반 비장애인들에게도 벅찬 일이란걸. 직장동료들이 베푸는 친절과 배려에 젖은 채 장밋빛 단물만 빨며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란걸.각성하기 시작하자 영이는 학교 때 기억이 하나 둘, 숏츠 릴스처럼 스쳐 지나갔다. 초등학교 땐 조원들과 함께 하지 않으면 체육 성적 빵점이라는 선생님 엄포에, 친구들과 당장에 강당으로 가서, 인기 대중가요에 맞춰 춤을 추는 친구들 사이에 우뚝 끼여 앉아 상체만 겨우겨우 움직이는 율동을 하며 얼굴이 불에 타는 듯한 부끄러움을 이겨내기도 했고.
중학교 땐 방학 숙제로 독후감 쓰기 과제가 있었는데, 영이와 읽은 책 권수에서 1권 차이로 밀렸던 친구가 그 자리에서 독후감 한 편을 더 쓰기 시작하자, 이에 질세라 영이도 친한 친구들의 응원을 받으며 독후감을 더 써내려가는 ‘원고지 워리어’를 펼치기도 했었다. 맘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새벽 3시 반이라도 꾸역꾸역 일어나서 인터넷 결제 버튼을 클릭해야 하고, 구매한 뒤로도 품절이 되나 안 되나 지켜봐야 직성이 풀리는 승부사가 바로 고영이다.
그런 고영이에게 자신으로 인한 계약 파기는 용납할 수 없는 문제 중의 문제였고, 노훈 팀장을 1차 관문 삼아 뛰어넘고 말겠다는 미션을 스스로 만들었다.끝날 줄 모르는 영이의 설득에, 훈은 팀원들에게 물어보고 다수결로 결정하자고 일단 한발 물러났다.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훈은 해린과 동혁을 불러 모아놓고, 달달커피 계약을 다시 설득하고 진행하는데 찬성하는 사람은 거수해 달라 했다. 눈치 빠른 동혁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영이를 보더니 영이가 훈을 설득 중인 걸 단박에 알아챘고, “나는 찬성!” 하며 선수쳤다. 해린은 훈의 의견을 따르고 싶지만, 동혁이 영이의 간절한 얼굴 좀 보라는 듯 눈짓하고, 슈렉의 장화 신은 고양이 눈빛으로 어필하는 영이를 보자 약자의 꿈과 희망을 꺾는 악인이 되는 것만 같아 도저히 반대할 수가 없어, 역시 찬성표 손을 들고 말았다.
3 대 1. 투표 결과에 만족한 영이가 의기양양 훈을 바라보았다.달달커피 관계자는 현재 강릉 소재의 펜션에 머물면서 워크숍을 진행 중이라며 당분간은 미팅 자체가 어렵다는 입장을 훈의 이메일을 통해 밝혔다. 동혁은 정중한 거절 의사를 표한 거라고, 지금 당장 접촉하지 않으면 기회는 아예 물 건너 가버린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해린 역시 워크숍이라고 하지만 다른 광고업체 선정 회의를 하는 자리일 거라고 예측했다.
영이는 마음이 급해졌고, 당장 강릉에 가겠다고 채비하며 장애인 콜택시 앱을 열었다. 하지만 장콜은 한번 불렀을 때 대기시간이 워낙 대중없어서 언제 배차될지 모르고, 최근 들어 시, 군간 경계 운행 지역이 확대되었다곤 하지만 관외 지역은 더욱 배차 받기 어렵다는걸, 양꼬치집에서 영이 이동 방법 검색을 수십 번 해보며 이미 알고 있었던 훈이, 팀원들 다 같이 자신의 차로 함께 이동하자고 리드했다.훈이 영이를 안아 조수석에 태우는 동안 동혁과 해린이 영이의 휠체어를 어떻게 트렁크에 실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자, 훈이 다가와 익숙하게 휠체어를 수동으로 전환하고 접어서 트렁크에 실었다. 동혁은 오오 감탄하며 엄지를 척 내밀어 보였지만, 해린은 훈이 그만큼 영이와 가까워졌고, 그만큼 자신과 멀어지고 있단 사실에 훈에 대한 마음 귀퉁이가 한 번 더 접히는 기분이었다.
늦지 않게 강릉에 도착하기 위해 엑셀을 밝아대는 훈은 차가 밀릴 때마다, 휴게소에 설 때마다 여전히 자신의 재채기 고백에 대한 영이의 인지 여부가 궁금해 영이 얼굴을 흘낏거렸다. 그런 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이는 동혁과 해린에게 광고주를 혹하게 만들 기획안을 어떻게 더 디밸롭해야 할지 조언을 구하느라 정신없었고, 훈은 일단 영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어떻게든 할 수 있게 만들어 줄 방법이 무엇일지 강구하는데 집중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해가 뉘엿뉘엿 오렌지색 물감을 풀 무렵, 강릉 바다를 달리고 달려 영이 일행은 광고주 업체 소유 펜션에 다다랐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펜션 입구를 찾아 두리번대고 있는데 마침 광고주 팀원들이 저녁 식사를 하러 우르르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훈이 그들을 불렀고, 동혁과 해린이 다가가는데, 옆으로 영이의 휠체어가 쌩-하니 말리지도 못할 속도로 먼저 광고주에게 달려갔다.
일러스트. 나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