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
스위스, 장애인 고용을 위한
‘일상생활 및 근로지원
서비스’의 확대
글. 이정주
경기도장애인복지종합지원센터 누림 센터장
유럽의 지붕, 눈부시게 아름다운 대자연의 위대함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알프스의 나라 스위스 연방(Swiss Confederation). 그 이면에는 척박한 산악 환경이라는 지형적 특성을 극복한 스위스인의 고단한 삶이 담겨져 있고, 더 깊은 중심에는 함께 견디어 낼 수 있었던 가족의 힘이 강하게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스위스의 장애인 복지를 들여다 보면, 역시 가족 돌봄을 근간으로 다양한 서비스가 제공되고 있고, 스위스 장애인고용 정책 역시 건강한 가정을 이루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위스 사회복지의 근간, 가족 돌봄
알프스 산맥이라는 지형적 특성을 이해하지 않고 스위스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지금과 달리 스위스는 알프스 산맥의 험악한 산세로 목축도 어려운 척박한 불모지였다. 그들 생존 수단은 용병업(傭兵業)이었다. 중세부터 근세까지 모든 유럽전쟁의 최정예 용병은 스위스 사람이었다. 그 희생으로 얻어진 돈으로 산악지대를 초원으로 일궈냈고 목축업을 발전시키는 동력이 되었다. 더 깊은 산속에서는 추운 겨울날 봄의 시간을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으로 시계를 분해하고 조립하며 스위스 정밀기계 장인이 육성되었고, 1·2차 세계대전 중 영세중립국으로서 톡톡히 얻어낸 수익으로 융프라우행 산악기차 등을 놓으며 전 세계에 부자나라 스위스를 알렸다.
그 시절 나머지 가족과 살림을 도맡았던 사람은 여성이었다. 믿기지 않게도 스위스 여성의 참정권은 1971년이 돼서야 주어졌다. 모르는 사람은 ‘여성 차별이 심했구나’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놀랍게도 산악지형에 살던 대다수의 여성들은 ‘나는 오로지 가사를 전담해야 한다. 정치에는 참여하지 않는다’는 스위스 여성만의 자부심이 숨어 있었다. ‘여성참정권이 없어도 나는 내 아이를 충분히 잘 돌볼 수 있다’는 말로 생계에 쓸모없는 참정권의 무용론을 주장한 것도 스위스 여성들이었다. 역설적으로 그만큼 스위스 여성은 가족 돌봄에 대한 책임감이 무척 강했던 것이다. 산악지대의 겨울나기를 상상해보면 알프스의 깊은 골짜기만큼 스위스 여성의 헌신도 깊을 수밖에 없었다. 부국이 된 오늘날에도 스위스는 여전히 가족 돌봄을 우선시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장애인 복지 역시 가족 돌봄에 최우선을 두고 있다. 장애인 자녀를 둔 가정에서 장애인 자녀 돌봄을 요청하면 정부는 그 가정을 위한 맞춤형서비스를 제공한다. 적정한 양육비 지급은 기본이다. 부모가 맞벌이라면 학교 또는 보육시설의 운영시간을 조정하여 일과 양육이 병립할 수 있도록 개별적인 지원에 나선다.
동등한 주체로 인식하기
그런 스위스가 최근에는 가족 돌봄의 연장선에서 장애인의 경제적, 사회적 홀로서기를 위해 생활 및 근로지원 서비스를 강화하고 있다. 장애인도 가족 돌봄의 객체로만 머물 수 없는 법, 가족을 이룰 수 있는 동등한 주체로 여기고 장애인의 홀로서기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하나는 주거공동체(WG: Wohngemeinschaft)1에서 독립생활을 지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프로인피르미스(Pro Infirmis)라는 장애인 복지기관에서 주거학교 프로그램을 개설하여 독립생활 훈련을 시킨다. 참가하는 장애인은 몇 달에서 일 년 정도 주거공동체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사회복지사가 생활 전반에 대한 교육과 상담을 정기적으로 진행한다. 주거공동체에서 독립적인 생활을 연습한 후에 기관 소속의 다른 1인용 아파트로 옮겨서 두어 달 정도 혼자 살아보며 최종 독립생활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이후 사회복지사와 함께 본인이 독립해서 살 공간을 찾고 계약하는 과정을 거친다.
또 다른 하나는 장애인의 일상생활과 근로지원을 위해 장애인의 필요에 따라 생활지원사를 제공하는 것이다. 투입 재원은 상해/장애 연금의 보조 지원제(Assistenzbeitrag IV)로 생활지원사를 장애인 당사자가 직접 고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생활지원사는 일상에서 필요한 옷 입기, 일어서고 앉기, 요리, 식사, 설거지, 위생, 출퇴근, 식료품 구매 등의 기본 생활을 도와준다. 신체장애에 따라 도움이 필요한 정도를 경미함, 중간, 심각 세 가지로 구분해서 생활지원사 혜택을 차등적으로 받을 수 있다. 기본 생활보조의 경우, 경미한 장애 수준은 주 20시간, 중간 수준의 도움은 주 30시간, 심각한 수준은 주 40시간까지 생활지원사를 고용할 수 있다.
또한 장애인 당사자의 근로(자녀 양육, 자원봉사, 구직활동, 학교, 직업 활동 등)와 관련된 분야에 필요한 보조인을 고용하는 경우 최대 주 60시간까지, 며칠 동안 지속적인 보조가 필요 한 경우에는 최대 주 120시간까지 고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56세 남성이 뇌졸중 후 신체 왼쪽이 영구적으로 마비되어 옷 입기와 식사 시간에 도움이 필요하지만, 기타 집안일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경우 경미한 장애로 구분된다. 이런 경우 옷 입기와 식사 시간에만 필요한 생활지원사를 하루 몇 시간 고용할 수 있다. 생활지원사의 임금은 장애인이 받은 상해/장애 연금으로 직접 지급한다. 장애인 본인이 고용주가 되어서 적절한 생활지원사를 고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종종 스위스 구인 사이트에 장애인 개인 보조 공고를 볼 수 있다. 최근에 난 공고에서는 휠체어를 탄 대학생이 아침 외출 준비와 귀가 후 일정을 도와줄 생활지원사를 구하고 있다. 코로나 방역을 이유로 대학이 원격 수업을 하는 동안에는 집에서 일상을 풀타임으로 도와줄 사람을 찾고, 이후 대면 수업이 다시 시작하면 아침 2시간과 저녁 2시간 생활지원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2.
상해/장애 연금에서 지급하는 생활지원사 지원비는 시간당 33.50프랑(약 42,700원)이다. 생활지원사가 간호, 수화 등 특별한 자격을 갖추어야 할 때는 시간당 49.80프랑(약 63,000원)이 책정되어 있다. 시간당 최저 임금 20프랑(약 25,000원)을 훌쩍 넘는 수준이다. 야간 근무는 사례별 그리고 지원의 강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1박에 책정된 지원비는 최대 88.35프랑(약 11만 2,400원) 정도이다. 무엇보다 이 제도를 가지고 있는 의의는 장애인 가족이 적절한 보수 없이 돌봄의 역할을 맡음으로써 발생하는 심리적 및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다. 또한 장애인 스스로 고용주로서 생활보조로 고용된 사람을 관리함으로써 피고용인과 고용인을 동시에 경험해보는 기회가 된다.
각자가 자신의 역할을 다할 때
스위스 가족 중심의 돌봄, 장애인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주거를 지원하여 홀로 설 수 있도록 하는 것만큼 가족의 평화를 안겨주는 것이 더 있을까? 흔히들 가족을 지원하는 것을 장애인에게나 가족에게 금전적으로 지원해주는 것 만이 전부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도 맞다. 하지만 그보다는 가족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적절한 서비스도 중요하다. 공부할 때 공부하고, 일할 때 일하고, 결혼할 때 결혼하고, 양육할 때 양육할 수 있도록 지원을 받을 때 장애인의 보편적 삶이 비로소 완성된다. 그러기 위해 장애인을 위한 주거독립 지원체계와 일상생활 및 근로를 지원하는 생활지원사 제도는 많은 시사점을 전해준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상생활을 지원하는 활동 지원사와 근로활동을 지원하는 근로지원이 완전히 다른 법률적 체계 속에서 이원화 되어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스위스의 통합지원제도가 훨씬 선진적으로 보인다. 앞으로 확대되고 있는 장애인근로지원인 제도의 활성화를 위해서도 스위스 생활지원사 제도를 참고하기 바란다. 또한 주거 돌봄 역시 정부의 주거공간 제공에만 초점을 둘 것이 아니라 장애인 스스로가 독립된 공간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생활지원사 등 전문적인 지원인력을 배치하는 노력도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참고문헌
황효빈 스위스 사회복지사님의 글(함께걸음)에서 일부 발췌요약함
1. 원래는 비장애인 청년을 위한 지원 제도인데,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젊은이들이 월세를 나누어 내는 형태다. 방이 여러 개인 아파트에서 1인 1실을 기본으로 타인과 같이 살면 서 부엌, 화장실, 거실 등 다른 공간은 함께 사용한다. 주거공동체 형태에서는 계약서상의 거주자들끼리 상의를 통해 집안일을 정확히 분담한다. 주택 시장은 월세가 일반적이고 보 증금 비율이 비교적 낮다. 그래서 주거공동체의 형태로 시작하는 젊은이들의 독립이 쉽다고 한다.
2. 스위스 법정 근로시간인 하루 8시간 20분, 주 5일이다. 이를 100%라고 부른다. 아침 2시간만 도와주는 생활보조인은 5%, 아침 2시간과 저녁 2시간을 모두 도와줄 수 있다면 하루 4시간은 10% 근무 환경이다.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사정과 필요에 따라 5% 근무 조건으로 두 명을 고용할 수도 있고, 10% 근무 조건으로 한 명을 고용할 수도 있다. 이렇게 퍼센트로 근무 시간과 일수를 계산하고 파트 타임 종사자의 비율이 높은 스위스 노동 시장의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