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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가 초능력으로 은유가 되는 배경은 뭘까?
영화 속 차별받는 초능력자들
글.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 문화콘텐츠학 박사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 같은 초능력자들은 항상 행복할까. 누구보다 빠르고 강한 이들조차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고민하고 괴로워한다. 여기서 드는 의문점 하나. 혹시 영화 속 초능력자는 누군가를 은유한 캐릭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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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와 초능력의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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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의 우월한 능력을 부각하는 장치로 서번트 신드롬이 활용되는 예는 익히 알려져 있다. 더스틴 호프만이 암산의 천재로 나왔던 영화 ‘레인맨’ 이후 너무 습관적으로 쓰이다 보니 이에 대한 지적은 이미 영화 ‘말아톤’에서도 등장한 바가 있다. 바로 코치가 초원이를 암산의 천재로 생각하다가 평범한 걸 알고 계면쩍어하는 장면이다. 그런데도 영화 ‘증인’에서는 자폐 소녀의 놀라운 청각 능력, ‘그것만이 내 세상’에서는 천재급의 피아노 실력 등 서번트 신드롬은 곧잘 등장했다. 사실 이러한 능력은 비록 뛰어나지만, 초능력 수준은 아니다. 더구나 초능력은 주로 SF나 판타지 액션 장르에 주로 등장하며 일반 극 영화에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초능력자들은 어느 순간 장애의 메타포를 지니며 영화에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어떤 함의가 있는 것인지 살필 필요가 있는 정도가 되었다.
초능력자라면 슈퍼맨을 먼저 떠올릴 수 있는데, 슈퍼맨이라는 초능력 캐릭터를 다시 부각한 영화 ‘맨 오브 스틸’은 장애의 관점도 새롭게 탈바꿈시켜주었다. 예상 밖으로 어린 시절 슈퍼맨 즉, 클라크는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미 초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보통 학생으로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예컨대, 같은 반 아이들은 모두 투시되어 뼈대만 보였고, 작게 속삭이는 말까지 모두 들렸다. 그 말에는 클라크에게 비난하는 말도 있어 듣지 않아야 하는데 괴롭게만 했다. 이렇게 이 영화는 장애가 부족이나 결핍에서 비롯되는 것만이 아니라 흘러넘치는 것도 장애라는 관점을 부각했다. 그런데 클라크에게 더 심한 문제는 단지 넘치는 능력 자체가 아니라 그런 능력을 통제나 조율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영화 ‘핸콕’에서도 비슷한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바로 윌 스미스가 열연했던 핸콕이라는 초능력자였다. 초능력이 제대로 조절이 안 되기 때문에 문제아 취급을 받고 결국에는 알코올 중독에 빠져 사는 루저 영웅 캐릭터가 된다. 슈퍼맨 시리즈에서는 클라크가 자동으로 학교에 다니지 않고 집안에 지내면서 초능력을 조정, 통제하게 된 것으로 그리지만, 현실에서는 일반 지구인 부부의 집에서 재택교육으로 그게 가능할지 의문이다. 핸콕의 경우 아예 학교에 다녔는지조차 의문이고, 원래부터 초능력자로만 상정되어 아쉬웠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초능력 아동에게는 다른 학교가 필요할 수 있다. 그 학교가 바로 ‘엑스맨’에 등장하는 찰스 자비에의 학교다. 찰스 자비에 교수는 뉴욕 웨스트체스터에서 영재학교를 운영하며 돌연변이라는 이유로 배제되거나 적응에 실패하는 뮤턴트들을 공부시킨다. 그 공부는 바로 자신의 능력을 조절하거나 적재적소에 잘 쓸 수 있도록 방법을 찾거나 훈련 시키는 학습이다. 천둥 번개 등 날씨를 조종하는 스톰, 염력을 사용하는 진 그레이, 벽을 뚫고 통과하는 키티 프라이드, 무엇이든 얼려버리는 아이스맨, 강철 외피의 괴력 인간 콜로서스 등이 여기에 속한 초능력자들이었다. 사이클롭스의 경우 눈에서 강력한 레이저 블라스트가 발사되기 때문에 평소 특수안대를 착용하고 있어야 한다. 이들의 능력은 출중하지만, 자칫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범법자가 될 수 있으니 집안에만 있어야 하니 교육기관이 필요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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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능이 아닌 유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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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캐릭터들을 통해 더 드러내려는 점은 바로 초능력자는 만능이 아니라는 유한성을 가졌단 점이다. 초능력자이긴 하지만 그들은 제한된 능력의 우월함이 있을 뿐이고 오히려 장애로 보인다. 역설적으로 이런 면에서 일반 사람과 같은 목표를 갖고 살아가야 한다. 바로 상호 협력과 조화이다. 개별 초능력자들이 같이 뭉쳐서 위기에 대처하는 콜라보의 철학이 필요하다. 이는 장애인들도 같이 각자 능력에 맞게 사회적으로 협력하고 조화로운 사회 구성원이 되어야 하는 것과 같다.
한편 중도에 초능력을 갖는 캐릭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스파이더맨’처럼 거미에 물려 초능력을 갖는 사례도 있지만, 자신이 장애를 입고 초능력을 얻게 되는 유형도 있다. 대표적으로 ‘데어데블’을 꼽을 수 있다. 매튜 마이클은 8살 때 교통사고에 처한 노인을 구하다가 화약 약품이 눈에 쏟아져 시력을 잃는데 대신 다른 감각들에서 초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 역시 스스로 제어가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시각장애인 무술 고수 스틱을 만나면서 자신의 능력을 통제하며, 영웅 캐릭터 데어데블로 거듭난다. 장애인 가운데는 중도에 특정 감각의 장애를 얻게 되면 다른 감각이 예민하거나 더 능력을 발휘하는 사례가 있는데 데어데블은 이를 생각할 수 있는 캐릭터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초능력이 생길 수는 없으며 하나의 메타포(은유, 상징)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간 초능력자들이 국내에서 등장했는데 바로 드라마 ‘무빙’이었다. ‘무빙’에서 주목한 점은 초능력자들이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용당하는 점이었다. 단적으로 정보기관이라는 국가 권력에 도구화될 수 있는 점에 주목했다. 더 눈길을 끄는 점은 바로 초능력의 유전과 가족의 정이었다. 개인주의 문화가 강해서 그런지 미국 캐릭터들은 초능력의 유전에 관해서 관심이 거의 없었다. ‘무빙’에서는 ‘엑스맨’ 시리즈의 캐릭터처럼 한 가지 초능력을 가진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다른 점은 부모가 된 초능력자들은 아이들의 능력을 숨기고 세상에 노출되지 않도록 분투하는 맥락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능력을 이용하려는 이들만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을 위험하게 생각해 사전에 제거하려는 이들도 있었던 점이다.
장애가 유전되는 경우를 생각했을 때 ‘무빙’의 착안은 의미가 있었다. ‘무빙’에서 초능력자들이 이용당하는 것은 복지 기관임을 내세워 장애인을 착취하는 시설들에 대해서 생각할 수도 있겠다. 또한, 유전이라는 점에서 일부 장애인을 편견에 따라 배척하려는 사회 시스템을 떠올릴 수도 있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고자 한다. 영화 ‘슈퍼맨이었던 사나이(2008)’에서는 자신을 슈퍼맨이라고 여기는 사나이가 등장하는데 알고 보니 그는 과거에 아내와 딸이 교통사고를 당했고, 도와주는 이들이 없어 목숨을 잃자 큰 충격에 정신 장애를 얻게 되고 스스로 초능력자가 되고자 했다. 우리가 초능력을 바라는 것은 어쩌면 이런 정신적 외상을 입은 경험이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결국에는 우리 스스로 나서는 수밖에 없는 점을 알고 있으면서 말이다. 영화 ‘도그맨’에서는 아버지 때문에 장애를 얻게 된 주인공이 스스로 어려운 이들을 돕기 위해 나서는데 때론 범법도 하게 되니 반영웅 캐릭터가 된다. 초능력자들도 범법의 경계에서 분투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을 강요하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조커처럼 장애인에게 범법(犯法)하게 만드는 사회 구조가 그렇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