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AD 웹소설

『고양이 눈 키스』

8화, 눈치 싸움

글. 김뜰
뇌병변장애를 가진 작가로 영화, 웹소설, 웹드라마, TV 드라마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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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영이

    고영이 (23세~29세)
    뇌병변장애, 대학생~광고영상업체 신입사원

    휠체어 사용 장애인. 가만히 앉아 있으면 장애인으로 보이지 않지만 움직이면 굳은 몸동작이 드러나고 말하는 것 역시 약간 어눌하다. 그러나 웃는 얼굴로 ‘팩트폭행’을 서슴지 않는다. 일하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사회생활 경험이 적고 인간관계도 좁아 사람들에게 오해를 사는 경우가 많다.


  • 노훈·그 XX

    노훈·그 XX (21세~27세)
    대학생~광고영상업체 팀장

    태어나서 장애인을 본 게 고영이가 처음이다. 나쁜 의도가 있어서라기보다 잘 모르고 서툴러서 실례를 저지르는 스타일.
    머리도 좋고 일머리가 있어서 이른 나이에 일찍 승진했다. 약 서너 번 해 본 연애가 전부이고 외동아들이라 여자를 잘 모른다.


  • 구동혁

    구동혁 (27세)
    광고영상업체 편집 PD

    노훈과 고교 동창, 군대 동기 사이다. 눈치가 매우 빠른 편이고, 분위기 파악에 능하다.
    서로 비난과 험담이 주 대화지만, 노훈의 대나무숲이 되어 주는 존재다.


  • 변태호

    변태호 (27세)
    카페사장

    고영이와 초등학교 때부터 같은 반이었고 고영이 휠체어 전담 드라이버였다. 영이를 좋아하는 맘도 있는데 친구 사이가 어색해질까 봐 감추고 있는 상태.
    영이와 티키타카가 좋다.


  • 송해린

    송해린 (25세)
    광고영상업체 디자이너

    입사 2년차. 사수였던 노훈을 좋아하는 중이고, 노훈도 이를 알고 있다.
    착한여자 콤플렉스가 있는 편이다.


  • 우지선

    우지선 (29세)
    간호사

    고영이와 초등학교 때부터 단짝이었고, 고영이의 화장실, 식사, 목욕 등등 브래지어 끈까지 올려 줄 정도로 도와줘 보지 않은 게 없다.
    영이가 누구보다 믿고 의지하는 친구. 영이를 좋아하는 태호를 좋아한다.


훈이 돌아보자 태호가 건성으로 까딱 목례 하더니 당신은 내 목적이 아니란 듯 훈을 가볍게 제치고 잠든 영이를 흔들어 깨웠다. 귀찮아죽겠단 영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팔랑팔랑 손을 흔들어 태호를 쫓았다. 수년간 영이와의 술자리를 통해 터득한 행동강령이 있기에, 태호는 허리를 숙이고 전동휠체어 뒷바퀴 레버를 올려 수동 전환 시킨 뒤, 한 손으로 영이 어깨를 잡아 넘어가지 않도록 지지해주고, 다른 한 손으론 휠체어 손잡이를 밀어, 숙련된 조교 태세로 식당 테이블을 나섰다. 한손만으로도 자유자재 스무스하게 휠체어를 다루는 운전 실력이, 오랜 시간 영이 옆에서 도와준 친구란 걸 훈은 알 수 있었다. 태호를 기다리는 동안 이미 식사비 계산을 마쳤던 훈은, 영이 핸드백을 마저 챙겨 들고 급히 태호의 뒤를 따라 나갔다.

노훈·그 XX “그쪽이 고영이 씨 친구라는 건 어떻게 믿습니까?”

영이를 데리고 나와 SUV차량 뒷좌석에 뉘이고, 전동휠체어를 솜씨 좋게 분리해서 차 트렁크 안에 싣고, 서둘러 운전석에 오르려는 태호를 막아서며 훈이 물었다. 지금 이토록 일사천리 처리 과정을 보고도 하는 말이냔 듯 태호가 픽 웃었다. 훈도 사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냥 영이 데려다주는 길에 같이 가고 싶단 거였다. 태호가 알아들은 얼굴로 시큰둥하게 말했다.

노훈·그 XX “타세요.”

어두운 시내 도로, 각종 상점 간판 조명들만 요란하게 시끄러운데, 차 뒷자리 영이는 쿨쿨 잘만 자고, 운전석과 조수석에 나란히 탄 시커먼 남자 둘이 어색한 침묵 속에 딴청을 피우다 태호가 안 되겠다 싶어 라디오를 틀었다. 훈도 괜히 상체를 틀어 잠든 영이 모습을 한번 돌아보는데 뒷좌석 아래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문득 시선을 내렸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차량 천장에 머리를 찧었다. 태호가 태연하게 고양이 처음 보냐고 물었다. 멀리서 길고양이 정도는 본 적 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직관한건 처음이라는 훈에게, 태호는 길고양이 출신의 반려묘라고 ‘나비’를 소개하며, 원래는 운영하는 카페나 집에 두고 다니는데 오늘은 몸이 좀 아파 혼자 두는 게 걱정이 돼서 데리고 나왔다고, 그리고는 본격적인 수다에 앞선 의식을 치르듯, 아까 틀었던 라디오 전원을 껐다. 초등학교 때 영이를 처음 만난 기억부터 영이와 싸웠던 얘기, 영이가 답안지 밀려 써서 한 시간이 넘도록 울었던 얘기, 영이가 가장 크게 웃었던 웃긴 얘기, 취업 면접에서 떨어져 술 먹고 뻗었던 얘기 등등, TMI스럽지만 그렇다고 장황하지도, 구구절절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태호가 이어갔다. 훈은 처음엔 누가 물어보길 했나, 오랜 시간 영이 옆에 같이 있었던 게 자기라고 자랑하는 건가 싶어 퉁명스러웠지만, 어느새 저도 모르게 점점 빠져들었다. 그러다 태호가 툭 던지듯 물었다.

노훈·그 XX “고영이, 그쪽, 그러니까 팀.장.님.한테는 눈 좀 잘 마주쳐줘요?”

갑자기 웬 뜬금포인가 의아했지만 훈이 생각해보자 영이가 누구든 잘 소통하고 트러블 없이 지내긴 해도 상대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던 건 떠오르지 않았다. 훈에게도 마찬가지. 째려보고, 쏘아보고, 웃어 보인 적은 있어도 1분, 아니 고작 30초 정도도 영이가 눈을 마주쳐준 기억은 없었다. 태호는 영이가 마치 ‘나비’ 같다고 했다. 늘 곁에 있어줘도 정작 다가가려 하면 얄짤없이 내치고 자신만의 공간 안에 들이는 법이 없다고, 항상 적정선을 지켜 거리를 두는 고양이 같은 고영이. 그래도 ‘나비’는 가끔 태호와 눈을 맞추어 부드럽고 천천히 깜빡이는 눈인사를 해주는데, 이걸 애묘인들이 이른바 ‘고양이 눈 키스’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 옛날 왕에게 성은을 입는 격이라며, 고영이와의 눈 맞춤도 얼마나 귀한지, 영이 눈 키스 한번 받아봤으면 좋겠다고, 허허실실 태호가 웃었다. 웃는 태호의 눈 속에서 친구로서의 우정, 이성으로서의 사랑을 넘어 얼마나 고영이란 사람 자체를 아끼고 생각하며 좋아하는지, 애틋해하는지 읽을 수 있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웅장해진 훈이 혹시나 모를 눈 키스를 기대하며 뒤를 돌아보자 좌석 아래에서 식빵을 굽던 ‘나비’가 카아악 위협했고, 훈은 움찔, 몸을 돌려 앉았다.

태호와 함께 영이 집 앞에서 부모님께 영이를 들여보낸 훈은 가까운 지하철역에서 내려 태호와 헤어졌다. ‘영이 좀 잘 부탁합니다.’ 이 말이 영이와의 관계에 있어 우위 선점이란 걸 잘 아는 두 남자가, 랠리 하듯 주고받다가, 태호가 먼저 “나중에 술 한 잔 하죠!” 라며 맥을 끊었고, 훈이 “좋습니다. 고영이 씨는 빼고.” 라며 지지 않는 멘트로 끝까지 수비했다.

집에 돌아온 훈과 태호에게 각각 해린, 지선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해린의 전화연락이 정말로 의뢰업체의 ‘VD’, ‘walk in’ 매출 보고서 제출기한이 궁금해서가 아니었고, 지선의 전화연락이 정말로 ‘나비’의 방광염 진료 후기가 궁금해서가 아니었지만, 훈과 태호는 질문에 대한 답변만 해주고 스몰토크 하나 없이 전화를 끊었다. 태호는 최근 들어 영이 입에서 자주 나오던 노훈이란 사람이 생각보다 훨씬 더 후진 놈이 아니라 짜증이 났고, 훈은 과연 오늘 내뱉은 고백이 영이 기억에 남아있을지 없을지, 출근해서 영이가 어떻게 반응할지 가슴이 두근거려, 두 남자 모두 도통 잠이 오지 않는 긴긴 밤이었다.

영이가 어떻게 나올지 겁이 나서 하루 연차를 쓸까 갈등까지 했던 훈이 평소 출근시간보다 늦게 사무실로 들어섰다. 곁눈질로 영이 자리를 훔쳐보니 영이는 이미 출근해서 자리에 앉아 업무를 보는 중인지 연신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괜한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 앉은 훈이 영이를 의식하며 뚝딱거리자 이미 모든 서사가 눈에 선하다는 듯 동혁이 히죽 웃었다. 그 모습이 얄미워 훈이 지나가는 척 동혁의 뒤통수를 툭 때리는데, “팀장님!” 하고 영이가 훈을 불렀다. 훈이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

노훈·그 XX “ㄴ..네, 네?! 저, 저요?”

그러자 영이가 “네! 조용히 좀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여긴 너무 개방돼 있어서... 어디서 뵈면 좋을까요?” 하고 물으며 훈을 쳐다보던 시선을 스르륵 미끄러뜨렸다. 자신의 심장소리가 블루투스 스피커 연결이라도 된 건가 싶을 만큼 크게 들려 훈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점심시간 후 회의를 마친 뒤 사내 커피숍에서 영이를 만나기로 한 훈은 약속시간보다 20분이나 먼저 테이블 앞에 앉아있었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미리 시켜놓고 목이 타서 몇 모금 마시다보니 벌써 3분의 2 가량이나 마셔버렸다. 한잔을 더 시켜야 되나 어쩌나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카페로 들어서는 영이 휠체어가 보였고, 훈이 손을 들어 아는 체 하자 순식간에 다가와 영이가 훈과 마주앉았다. 훈이 자기 몫을 한잔 더 시키려고 한다하자, 영이가 사무실에서 많이 마셨다며 자기 몫의 커피 잔을 훈의 앞으로 밀었다. 분명히 어제 했던 자신의 고백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한 훈이 아메리카노만 속절없이 빨대로 쭉쭉 빨아올리며 영이 말을 기다리는데, 드디어 영이가 조곤조곤 내뱉은 뜻밖의 말에, 훈은 쿨럭쿨럭, 깜짝 놀라 사레에 들리고 말았다.

일러스트. 나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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