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일잘러

시각장애 판사 김동현

“우선 오늘 할 수 있는 것을
열심히 하는 거죠”

글. 김엘진
사진. 신현균

  • 국내 제2호 시각장애 판사 김동현 씨는 흔히 말하는 ‘웃상’이었다. 그를 만나기 전 했던 ‘의료 사고로 시력을 잃었으니 원망하는 마음이 남아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기우였다. 그는 시종일관 부드러운 미소와 차분한 말투를 보여주었고, 그와 헤어질 무렵 우리는 그의 여유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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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는 40대 독거 중증 시각장애인이자 서울지방법원 민사항소부 의료 전담 재판부 판사입니다. 마라톤을 좋아하고, 쇼다운 선수이기도 하고, 에세이를 낸 작가이기도 해요.” 김동현 판사의 자기소개였다. 독거, 시각장애, 판사, 마라톤, 쇼다운, 작가 이 모든 연결성 없는 단어들은 김동현 한 사람을 가리키는 키워드였다. 우리는 그를 표현하는 키워드를 하나씩 확인해보기로 했다.

  • 시각장애 2호 판사가 되다

  • 1982년 부산 출생의 김동현 판사는 카이스트를 졸업하고 로스쿨에 입학했다. 카이스트에서 로스쿨이라니, 어찌된 영문일까? “대학원 입학시험에서 떨어지고, 군대에서 앞날에 대해 고민했어요. 그러다가 과학기술 관련 변호사가 되기로 결정했고, 제대 후 로스쿨에 들어간 거죠.”
    로스쿨 2학년이 되던 해 그는 의료사고로 시력을 잃었다. 변호사가 되려면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 것들이 많을 거라는 생각에 고민하던 그는 국내 첫 번째 시각장애 판사인 최영 판사에 대해 알게 됐다. 최영 판사는 그의 앞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최영 판사님이 할 수 있었다면 저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무렵 한 공익 인권법 관련 변호사님에게서 ‘공익 소송이 정말 쉽지 않은데, 네가 법원에서 좋은 판결을 해주면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고 용기를 더 낼 수 있었고요.”
    김동현 판사는 “첫 번째보다 두 번째가, 두 번째보다는 세 번째가 좋은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1호가 닦아놓은 길이 굉장히 편안했다는 것. 전임자 효과는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최 판사님 덕에 시험 볼 때 컴퓨터를 제공해주고 시간 연장을 해주는 등 많은 부분에서 이미 시스템이 만들어져 있었고, 법무부나 사법연수원에서도 시각장애인에 대한 편의 지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 업무를 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속기사가 어떤 역할을 해주면 되는지, 어떤 장비가 필요한지 등 전임자가 시행착오를 거치며 세팅해둔 시스템을 가져오기만 하면 됐다.
    “그러니, 제 이후 부임할 또 다른 장애인 판사에게도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얼마든지 도전하셔도 좋습니다.”
    그는 2020년 10월 임명, 2021년 3월 수원지방법원에서 신입 판사로 일했으며, 현재는 서울지방법원 민사항소부 의료 전담 재판부에서 근무하고 있다. 민사 항소부는 2심 재판을 하는 기관으로 2억 원 이하의 의료 사건을 전담하고 있다. 재판에는 1주일에 1회 정도 참석하며, 한 주에 3~4건의 판결문을 쓴다. 비장애인 판사들은 7~8건의 판결문을 쓰고 있으니 장애인으로서의 혜택을 받고 있는 거라고. 사실 그는 모든 기록을 귀로 들어야 하기에 비장애인들보다 많은 시간을 써야 한다. 두 명의 전담 속기사가 모든 기록을 한글이나 엑셀 파일로 만들어 그에게 주면 스크린 리더(Screen Reader_화면 낭독 프로그램)를 이용해 재판 기록을 확인하고 판결문을 쓴다.
    처음 판사가 되면서 ‘판사로서는 맡은 사건을 후회가 남지 않도록 판결하자’고 결심했고, ‘장애인으로서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못하겠다,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일을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도록 하자’고 결심했다는 그는 벌써 4년차 판사로 일하고 있다. “처음 결심했던 그 마음을, 그래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은 지키고 있어요.”라며 그가 자신 있게 미소 지었다.

    • 서울지방법원 민사항소부 의료 전담 재판부의 김동현 판사

      서울지방법원 민사항소부 의료 전담 재판부의 김동현 판사

    • 시각장애 2호 판사 김동현

      시각장애 2호 판사 김동현

  • 알맞은 때에 진리의 가르침을 듣는 것

    • 그는 2012년 5월 실명 후, 2013년 2월 학교로 복학했다. 아무리 선구자가 있다고 해도 갑작스러운 사고 이후 일 년도 되지 않아 공부를 계속하기로 결심한 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일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논리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지인들이 학교에 있을 때 복학해야 도움을 얻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머릿속 지식을 놓치지 않으려면 되도록 빨리 공부를 재개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어요."
      자신과 마찬가지로 중도 실명을 겪은 김재왕 변호사를 찾아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김 변호사 역시 복학을 서두르는 게 좋다는 이야기와 함께 공부하는 법, 책을 찾는 법 등에 대해 아낌없이 공유해주었다. 의외로 가장 어려운 것은 책을 구하는 일이었다. 장애인도서관에 제작 신청을 하기도 하고, 복지관 서비스를 이용하기도 했고, 학교의 장애학생 지원센터 도움을 받기도 했다. 또한 책의 저자인 교수님을 찾아가 파일을 제공받기도 했다.
      그의 학업이 계속될 수 있도록 친구들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가장 큰 힘이 된 것은 역시 가족이었다. 사고 후 어머니는 아버지와 여동생이 있는 부산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어머니는 졸업할 때까지 2년간 매일 그의 통학을 포함해 모든 생활을 도왔다. 어머니는 그가 삼천배를 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장본인이기도 했다.

    • 근무하고 있는 서울지방법원 제1별관 앞에서
      근무하고 있는 서울지방법원 제1별관 앞에서

    “처음 사고가 나고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의 추천으로 삼천배를 하러 절에 들어갔었어요. 가기 전엔 한 달 동안 삼천배를 나눠서 하는줄 알았는데, 하루에 삼천 번을 시키더라고요. 주말도 없이. 몸이 힘든 것은 당연하고, 마음도 힘들었죠.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혹여 눈을 뜰 수 있을까, 기적이 생길까라는 희망으로 삼천배를 마쳤으나 기적은 없었다. 대신 그는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이제 내려놔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스님께서 ‘육신의 눈은 뜨지 못했지만 마음의 눈은 떴다’고 해주셨는데 그 말씀이 위안이 됐어요. 그리고 정말 좋은 경험을 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보자는 결심이 섰어요.”
    친구들도 가족들도, 어느 누구도 그에게 이제 공부나 꿈은 포기하고 편안하게 살라고 말하지 않았다. 모두가 김동현이란 사람을 신뢰했고, 그 덕에 그 역시 스스로를 믿을 수 있었다.
    “못할 건 뭐냐고, 앞서 하신 분들이 한대로 따라하다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실명했지만 살아나가야 하잖아요. 그렇다면 뭔가 일을 해야 하는데, 제가 하던 것이 있고 그걸 할 방법이 있는데 조금 더 힘들어졌다고 안할 이유가 없었어요.”
    ‘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을 하자’는 마음은 시력을 잃은 후 찾은 삶의 잠언이다. 사고 전에는 항상 미리 걱정했다. ‘항상 불안하고 발을 동동거렸다’고 그는 기억한다. 그러나 사고 이후 본인에 대한 기대감이 줄었고, 오히려 그것은 그에게 자유를 선사했다.
    그렇게 다시 일어섰다. 삼천배를 하며 인연을 맺은 스님은 지금까지도 매일 아침 그에게 한 구절의 글귀를 보내주신다. 김동현 판사가 오늘의 글귀를 읽어주었다.
    “존경과 겸손, 만족과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것, 그리고 알맞은 때에 진리의 가르침을 듣는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거니. 숫타니파타(Suttanipata, 經集) 147편”

  • “장애인 위한 인력 더 필요”

  • 판사가 되기 전 그는 서울특별시 장애인 인권센터 변호사로 일했다. “지금은 기록으로 장애인들을 만나지만, 그때는 실제로 장애인들을 만났기에 더 기억에 남아요.”
    그는 서울의 한 식당에서 강제 노동을 하다가 구출된 지적장애인의 소송을 맡은 적이 있었다고 했다. 피해자는 복잡한 절차를 거쳐 손해배상을 받았지만 문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지적장애로 인해 피해자는 이후에도 휴대폰 사기, 명의 도용 등을 당하며 계속해서 역경을 겪어야 했다.
    “사각지대에 놓인 장애인들을 돕는 데는 제도도 중요하지만 인력이 가장 필요해요. 이들을 지속해서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하고,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찾아 적절한 단계에서 지원해야 합니다. 수사를 받을 때나 재판을 받을 때도 이들의 말을 충분히 잘 이해하고 전달할 전문가가 필요하고요.”
    그는 장애인의 고용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을 전했다. “장애인 당사자도 일할 역량이 되어야 하지만, 사회적으로 이들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어야겠죠. 특히 접근성을 갖춰야 해요. 장애인이 홀로 출퇴근이 가능하도록, 또한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 등 장비를 갖출 수 있도록요. 주변에서도 장애인을 믿고 함께 일할 수 있다는 인식이 필요하고요.”

    점자 유도블록을 따라 걷는 김동현 판사

    점자 유도블록을 따라 걷는 김동현 판사

  • 24시간이 모자라

  • 그의 하루는 바쁘게 돌아간다. 혼자 살고 있는 그는 장애인 활동지원서비스의 도움을 받고 있다. 아침엔 30분 정도 홈트를 한다. 그리고 활동보조인이 차려준 아침을 먹고 출근한다. 일과를 마친 후에는 운동을 하는 편. 화요일에는 볼링, 쇼다운(Showdown_시각장애인을 위한 스포츠로 탁구와 비슷하다)은 일주일에 1~2일 정도, 토요일에는 달리기를 한다.
    “10월 25일 전국장애인체전에 쇼다운 선수로 참여합니다. 물론 금메달이 목표죠.” 11월에 열리는 JTBC 서울마라톤에도 나갈 계획이다. 운동하지 않는 날은 이북으로 책을 읽기도 하고, 여자친구를 만나기도 한다. 연애한 지 벌써 4년이 됐다고.
    “제 꿈은 금메달이고요!” 그가 빙긋 웃더니 덧붙인다. “할 수 있을 때 해야 하니까요. 저도 운동으로 더 좋은 성적을 내기는 어려워지는 나이라 올해야말로 좋은 성적을 거뒀으면 좋겠습니다.”
    김동현 판사는 오늘도 그렇게 하루를 채워나가고 있다. 일단 오늘 할 수 있는 것은 열심히 해보자고. 그렇게 채운 오늘은 아마 그의 내일도 착실하게 채워줄 것이다.

    “못할 건 뭐냐고, 앞서 하신 분들이 한대로 따라하다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실명했지만 살아나가야 하잖아요. 그렇다면 뭔가 일을 해야 하는데,
    제가 하던 것이 있고 그걸 할 방법이 있는데 조금 더 힘들어졌다고 안할 이유가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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