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AD 웹소설
『고양이 눈 키스』
7화, 영이 업고 튀어
글. 김뜰
뇌병변장애를 가진 작가로 영화, 웹소설, 웹드라마, TV 드라마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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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이 (23세~29세)
뇌병변장애, 대학생~광고영상업체 신입사원휠체어 사용 장애인. 가만히 앉아 있으면 장애인으로 보이지 않지만 움직이면 굳은 몸동작이 드러나고 말하는 것 역시 약간 어눌하다. 그러나 웃는 얼굴로 ‘팩트폭행’을 서슴지 않는다. 일하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사회생활 경험이 적고 인간관계도 좁아 사람들에게 오해를 사는 경우가 많다.
노훈·그 XX (21세~27세)
대학생~광고영상업체 팀장태어나서 장애인을 본 게 고영이가 처음이다. 나쁜 의도가 있어서라기보다 잘 모르고 서툴러서 실례를 저지르는 스타일.
머리도 좋고 일머리가 있어서 이른 나이에 일찍 승진했다. 약 서너 번 해 본 연애가 전부이고 외동아들이라 여자를 잘 모른다.
구동혁 (27세)
광고영상업체 편집 PD노훈과 고교 동창, 군대 동기 사이다. 눈치가 매우 빠른 편이고, 분위기 파악에 능하다.
서로 비난과 험담이 주 대화지만, 노훈의 대나무숲이 되어 주는 존재다.
변태호 (29세)
카페 사장고영이와 초등학교 때부터 같은 반이었고 고영이 휠체어 전담 드라이버였다.
영이를 좋아하는 맘도 있는데 친구 사이가 어색해질까 봐 감추고 있는 상태.
영이와 티키타카가 좋다.
오해로 점철된 대학 시절 기억이 가득한 영이가 신문하듯 꼬치꼬치 캐묻는 질문에, 누명을 벗겠다는 용의자의 간절한 심정을 담은 훈이, 물음표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바로바로 과거 자기 행동에 숨어있었던 행간을 짚어나갔다. 그러다 재채기처럼 발작스럽게 토해 내버린 고백. 깜짝 놀란 훈은 얼른 주워 담고 싶었지만, 타임슬립이 아닌 이상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아! 아, 아니, 그, 그게 아니라... 제, 제 말은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동공 지진에 시선이 이리저리 팝콘처럼 튀며 허둥대던 훈이 조심스레 눈을 들어 영이를 쳐다보는데, ‘어? 이게 지금 맞아? 이게 정녕 실화란 말인가?’ 작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훈과 마주 앉은 영이가 테이블에 이마를 맞대고 쿨쿨 곯아떨어져 있었다. 아까 훈이 고백 재채기를 하는 순간 뭔가 쿵! 떨어지는 소리가 나긴 했다. 영이 쪽을 쳐다볼 수가 없어서 그냥 영이가 놀라 손을 떨어뜨렸다거나, 물컵 내려놓는 소리쯤 되겠거니 했는데, 그게 설마 영이 머리 부딪히는 소리였을 줄이야. 훈이 반쯤 일어서 커다란 키를 구부정하게 낮춰 영이 어깨를 흔들었고, 다소 믿을 수 없다는 투로 재차 물었다.
“선배! 영이 선배?! 지금 뭐 여, 연기하고 있는 거 아니죠? 지, 진짜 자는 거예요? 자요?”
영이의 도톰한 입술 사이로 쪼르르 흐르는 침방울이 대답을 대신해주고 있었다.
영이가 자기 고백을 들은 건지, 들었다면 술과 잠에서 깨어났을 때 기억이 되살아날 만큼 영이 머릿속 해마까지 공격이 가해진 건지, 아 이럴 줄 알았으면 공부 좀 더 해서 의대에 갈 걸 그랬다는 의식의 흐름에 다다를 때쯤, 훈은 당장 닥쳐온 현실을 자각했다. 만취한 영이를 집에 데려다줘야 하는데 영이가 사는 곳을 모른다는 것.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리며 영이 이력서를 떠올려보지만 주소 부분만 딱 블러 처리가 되어 부옇게 부유할 뿐이었다.
급한 대로 동혁에게 전화해서 영이 거주지 혹시 아냐, 이력서에서 본 기억 없냐 물어보자 내가 그걸 알면 스토커지, 이력서에서 그런 거 외우고 다니면 개인정보 보호법 위반이다, 영양가 없는 소리만 해댔다. 근데 영이 거주지는 왜 궁금한 건지 동혁이 물었고, 영이가 지금 만취해서 곯아떨어졌다고 하자 그렇게 술을 먹이면 어떡하냐, 제정신이냐, 세상 몹쓸 나쁜 놈 취급을 하는 동혁의 난리 난리 갈굼에, 훈은 말을 말지 싶어 전화를 끊어버렸다.
훈이 혹시나 해 다시 흔들어 깨워봐도 영이는 흠냐흠냐 입맛만 다시며 일어날 생각이 없고, 일단 식당에서 나가야 하겠다 싶어 영이 전동휠체어 뒤로 가 서서 끌어보는데, 육중한 몸체가 전혀 움직일 태도가 아니다. 휠체어가 전동이라 컨트롤러 버튼을 눌러 전원을 켠 뒤 조이스틱을 움직여야만 이동시킬 수 있는 것 같았다.
한 손은 잠든 영이 머리를 받쳐야 하고, 휠체어 옆에 서서 조이스틱으로만 조정하려고 하니 방향 컨트롤이 안 돼 이리 쿵, 저리 쿵, 충돌해대는 통에, 이래서 언제 갈 수 있나 싶어 막막하기만 한 훈의 귓가에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영이 핸드백 속에서 나는 소리였다. 뭔가 해결 방법이 생길 수 있다는 예감에 급히 영이의 핸드폰을 꺼내 본 훈은 액정화면에 뜬 ‘변태호’라는 이름에 잠시 멈칫했다. 성이 다른 걸로 보아 영이의 아버지도, 형제자매도 아닌 것 같고, 어머니라기엔 누가 봐도 남자 이름이다. 본능적 거부감이 돋았지만, 훈은 일단 전화를 받았다.
시커먼 목소리에 서로 누구냐고 날을 세워 신분을 캐던 두 남자는 영이가 지금 술에 취해 혼자 집에 못 들어갈 컨디션이란 말에, 전동휠체어를 수동으로 전환하는 방법이 있다는 말에, 서로 한발 물러났다. 초등학교 때부터 영이와 가장 친한 친구라고, 현재 같은 회사에서 근무 중인 직장동료이자 팀장이라고 서로를 소개한 태호와 훈의 통화 중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전동휠체어 아랫부분에 어떤 레버를 내리면 수동이 된다고 설명하던 태호가, 아니다, 잠시 기다려달라, 내가 직접 가서 영이를 데리고 가겠다, 거기가 지금 어디냐, 주소를 찍어달라며 말을 바꿨다.
휠체어 수동 전환 방법과 영이 거주지만 가르쳐주면 내가 데려다줄 수 있다고, 굳이 오실 필요 없다고 훈이 버텨봤지만, 거주지는 본인 동의 하에 알려줘야 하는 거라고 일갈하는 태호의 말에, 빈정 상한 마음을 꾹 누른 채 그러면 와주셔라 문자로 주소 보내겠다, 전화를 끊었다.
양꼬치 식당 주소를 문자로 보낸 뒤 왠지 열이 올라 훅 더워진 훈이 생수를 컵에 따라서 벌컥벌컥 들이키고 다시 영이 맞은 편 제자리에 앉았다. 푹 한숨을 내쉬며 문득 영이를 돌아보자 아주 제집 안방인 양 편안하게 잠든 얼굴이 보였다. 간지럼을 느꼈는지 콧잔등에 주름을 만들며 씰룩대더니 한쪽 손을 들어 올려 코를 쓱쓱 비비고는 다시 냠냠 맛있게도 잠을 자는 모습에 훈이 피식 웃었다.영이는 교양과목 수업 시간에 훈을 처음 만났다고 생각했지만, 훈이 영이를 만난 건 훨씬 전이었다. 대동제 때 연극동아리에서 저녁마다 했던 공연이 있었는데 그 공연을 보러 여학우들과 같이 온 영이가 대여섯 개 정도 되는 계단을 올라가지 못해 난처해하고 있었다. 역시 같은 시간 공연을 보러 갔던 훈은, 공연장까지 영이를 업어서 데려다주면 안 되겠냐 물었고 영이는 뜨뜻미지근했지만, 옆에 같이 왔던 여학우들이 손뼉 치며 좋아라하는 분위기에 그렇게 해달라고 고갤 끄덕였다. 그렇게 영이를 업고 공연장 좌석에 앉혀줬던 훈은 영이 얼굴을 또렷이 기억했고, 오고 가며 스칠 때마다 아는 체했지만, 영이는 훈을 전혀 기억 못하는 눈치였다.
공강 시간이면 친구들과 어울려 캠퍼스를 하릴없이 거닐고 시간을 죽이던 훈과 달리 영이는 뭐가 그렇게 바쁜지 항상 오토바이 정도는 족히 되어 보이는 빠른 속도로, 긴 생머리를 펄럭이며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었다. 강의실 복도를 오고 가며 스치는 영이는 항상 봄처럼 화사하게 웃는 얼굴이라,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탁한 머릿속에 산들바람이 불어 드는 느낌이었다. 수업 시간 강의실에 매번 1등으로 도착해서는 전동휠체어 발 받침 양쪽 쇳대에 의자 다리를 착! 끼워서 빼낸 뒤, 드르륵 드르륵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빈 곳에 터프하게 밀어두고, 드리프트 하듯 책상 앞에 휠체어를 세우고 컨트롤러 전원을 탁! 멋지게 끄는 모습이 마치 내 앞에 거칠 것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는 ‘노빠꾸’ 같아서 웃음이 나곤 했다.그즈음이었던 것 같다. 외동아들에, 온갖 걱정 미리 당겨서 속 끓이는 훈은, 자신과 반대 선상에 있는 영이가 처음엔 멋있다고 느꼈다가, 언제부턴가는 심쿵하게 예쁘다가, 또 언제부터는 잠들기 전에 모락모락 떠올랐다가, 하루 종일 눈 감아도 계속 생각나 아무 때고 영이 얘길 하지 않으면 혀에 가시가 돋치는 병에 걸렸다가, 결국 영이와 마주치기만 해도 두근두근 심박수가 요동치는 지경까지 이르고 말았다.
그토록 숱한 만남에도 단 한 번을 알아봐 주지 않는 영이 태도 때문에 영이가 철벽 치며 밀어내는 거라 판단했던 훈은 꼬깃꼬깃 마음을 접었는데, 이렇게까지 나쁜 X로 영이 기억 속에 저장돼 있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일반공채로 당당히 합격해 여전히 일 잘하는 선배라 너무 뿌듯하고, 이제라도 예전 오해 풀어서 다행이다, 영이 잠든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훈은, 한창 인기 있었다는 드라마 제목처럼 영이를 업고 튀고 싶은, 딱 그 심정이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영이 머리칼을 쓸어올려 주려고 뻗어 든 훈의 손을 누군가 탁 잡아챘다. 태호였다.일러스트. 나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