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발견

끊기지 않는 이동의 권리,
자립과 포용의 발판

글. 홍윤희
장애인이동권증진컨텐츠제작 협동조합 무의 이사장

  • 리프트가 고장 나면?

  • “휠체어 리프트가 고장났다고요? 계단 위쪽에 계시면 3호선이나 9호선, 아래쪽에 계시면 7호선에 연락하셔야 해요.”
    2011년 서울 고속버스터미널 역 휠체어 리프트가 고장 나서 역무실에 문의했을 때 들은 이야기다. 계단 위 3~9호선 쪽에 붙어 있던 고장 안내문에는 ‘7호선으로 갈아타시려면 다시 뒤를 돌아 9호선을 타고 동작역에서 내려서 4호선으로 갈아탄 후 총신대입구역에서 7호선으로 갈아타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리프트가 언제 수리되는지도 쓰여 있지 않았다. 리프트를 언제 이용할 수 있는지 물어보려고 역에 전화했더니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관할 구역이 어디인지에 따라 다르니 내가 있는 위치를 이야기하라는 것일 터다. “제가 중간에 서 있으면 어디로 연락드려야 하는 건데요?”란 내 질문에 역무원은 답변하지 못했다. 예상했겠지만 그 이유는 2011년 당시 3호선, 7호선, 9호선 전철 운영사가 다 달랐기 때문이다(2016년 1~4호선을 잇는 서울메트로와 5~8호선을 잇는 도시철도공사가 통합되어 서울교통공사가 됐다).
    엘리베이터를 다 놓기는 어렵더라도 최소한 엘리베이터 위치는 눈에 띄게 잘 표시해 줄 수 있을 텐데, 역무실의 전화번호 정도는 함께 안내해 줄 수 있을 텐데. 협동조합 무의의 ‘서울지하철교통약자환승지도’는 이렇게 지하철 안에서라도 ‘끊김 없는 이동’에 대한 정보를 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만들어졌다.

  • 휠체어 이용이 불편한 교통수단들

  • 서울-수도권에서 장애인 당사자, 특히 휠체어 사용자들의 경우 전철 선호도가 매우 높다. 버스의 경우 휠체어가 탈 수 있는 저상버스와 이용이 어려운 계단 버스가 번갈아 오기 때문에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다. 장애인콜택시는 부르면 대기시간이 한없이 길어지는 경향이 있다. 지역 상황이 열악할수록 콜택시 대수가 적다. 이러다 보니 서울-수도권 지역 휠체어 이용자들은 웬만하면 지하철로 다니려 한다.
    그런데도 비교적 편리하다는 교통수단인 전철 안에서조차 운영사가 다른 경우 장애인 승객들에겐 ‘끊김 없는 서비스’ 제공이 되지 않는다. 수도권엔 무려 24개의 전철 노선이 있는데 그 중엔 1970년대에 지어진 것도 있다. 엘리베이터를 비롯한 장애인 편의시설을 짓는 것을 의무화한 「장애인편의증진법」은 이후에 생겼다. 오래된 역에는 엘리베이터 대신 리프트가 설치되어 있어서 역무원이 와야만 휠체어 이용자의 이동이 가능하다. 오래된 노선들의 환승 구간에서는 여전히 서비스 공백이 잦다. 안내문이나 안내판 형태가 제각각이라서 환승할 때 혼선을 빚기도 한다.

  • 간접적 효과를 거둔 무의 지도

  • 지하철 안에서 지도를 보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무의가 지도를 만든 이유는 지도가 필요할 정도로 경로가 복잡한 역이 꽤 많아서다. 엘리베이터 안내판이 잘 안 보여서 헤매거나, 비장애인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먼 우회로로 돌아가야 하는 일도 있다. 갈아탈 뿐인데 개찰구를 통과해야 하는 역들도 많다. 심지어 역 밖으로 나가서 빙 돌아가는 역들도 꽤 많다. 이런 역들은 갈아타는 데에만 족히 30~40분이 걸린다. 적어도 지도를 보고 미리 준비를 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 목적이기도 했다.
    지도 만드는 데 200명의 시민이 참여했다. 휠체어를 직접 타 본 시민들에게 미션을 부여했다. 휠체어 눈높이에서 ‘현장에서 바꿀 수 있는 것’을 제안해 달라는 것이었다. 기본적으로는 휠체어가 탑승하는 열차 칸, 엘리베이터 위치 등이 되도록 가깝고 환승 동선이 비장애인과 비교할 때 너무 차이가 나지 않도록 인프라를 잘 깔아야겠지만, 최소한 안내문, 안내판 양식이라도 통일하고 더 잘 보이게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조사한 시민들의 제안을 모아 서울교통공사에 전달했다. 무의 지도는 간접적인 효과를 거두었다. 휠체어나 유아차 환승에 대한 자세한 안내문들이 환승역에 붙기 시작했다. “우리 역은 휠체어나 유아차로 갈아탈 때 개찰구를 이용해야 합니다. 해당 승객은 개찰구를 이용할 때 빨간색 버튼을 눌러주세요.” 이런 안내문들은 이동의 끊김을 조금이나마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 홀로 등하교와 출퇴근을 할 수 있도록

  • “휠체어를 이용하고 있어요. 무의 지하철 환승지도가 첫 직장을 지하철로 다니는 데 큰 도움이 되었어요.” 지난해 여름 한 여성 직장인이 보내준 메시지를 보며 지도를 처음 만들자고 결심했을 때가 기억났다. 내 딸이 휠체어로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할 수 있을까? 태어날 때부터 척추 내 암세포가 척추를 눌러 하반신마비가 돼 휠체어를 타는 아이가 교육받고 일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끊김 없는 이동권이 보장되어야만 했다.
    “지하철에서 휠체어 탄 사람 본 적이 없는 데 많이 쓸까요?” 처음 지도를 만든다고 했을 때 어떤 발표장소에서 받은 질문이다. 지하철에서 휠체어를 볼 수 있으려면 엘리베이터가 갖춰져 있어야 하고, 장애인 승객에게 ‘그 휠체어 나라에서 주는 거지? 세상 좋아졌어’라는 흰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없어야 하며, 갈아타는 데 30분씩 걸리지 않도록 적절한 정보와 서비스가 제공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엘리베이터 한 번 타는 데 15분씩 걸리는 역에는 소위 ‘1역사 2동선’, 즉 같은 동선에 엘리베이터 두 대가 있어서 수요를 분산할 수 있어야 한다.
    “엄마, 걱정 마. 무의가 만든 지도가 있잖아.”
    딸이 지하철을 처음으로 혼자서 타고 낯선 역을 간다고 했을 때 걱정하던 내게 씩씩하게 말했다. 지도 자체를 많이 쓰기보다, 200명의 시민이 휠체어를 타고 함께 만든 지도의 존재가 딸에겐 용기와 외출의 디딤돌이 되었을 것이다. 만든 나조차도 이 지도가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는데 딸의 말로 깨닫게 됐다. 장애인 부모들, 또는 지원인에게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한번 외출해 보면 혼자 등하교하고 출퇴근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외출할 용기를 내는 장애인이 많아진다면 교육, 노동, 사회적 참여가 가능해지는 기반이 마련된다. 휠체어 이용자를 많이 못 봤기 때문에 굳이 환승 지도가 필요하지 않다는 질문자에게 비로소 답변할 수 있게 됐다. 아예 없던 자립수요를 끄집어낸다는 측면에서 ‘끊김 없는 이동권’ 제공은 기존 수요 공급의 법칙으로 측정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다. 무의의 환승지도는 홈페이지(wearemuui.com)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이전 페이지 이동 버튼
  • 다음 페이지 이동 버튼
  • 최상단 이동 버튼